“걔가 그러니까 열세 살 때였죠. 아버지와 어린 여동생과 함께 피난을 나왔디요. 그렇지, 그 여동생이 일곱 살인가 였디요. 그러나 피난길에 수원 어디멘가에서 그 여동생을 잃어버리고 영 찾질 못했어요.”

“그럼 아버지와 둘뿐이었겠군요.”
“그렇디요. 두 부녀는 대구로 부산으로 다니며 미군복 염색공장을 해서 꽤 돈을 모으고 나중에는 서울에 정착해서 통조림 공장을 차려 큰 돈을 벌었디요.”
않았나요?"

“녜. 그 아바이가 얼마나 신실한 사람인지 니북에 있는 마누라쟁이를 못잊 끝내 혼자 살다 갔디요.”
공장장의 눈에는 어느새 물기가 어렸다.
“그러면 허벽 사장은.......”
“예. 그 허벽 사장은 어떻게 알았느냐 하면.......”
공장장은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통조림 공장이 꽤 잘 되자 대학을 갓나온 순실이가 와서 일을 거들게 되었디요. 순실이는 주로 관청에 출입을 하며 공장을 도왔는데 그때 관청의 계장이 바로 허벽 사장이었디요. 근 일 년 동안 순실이가 관청을 들락날락하며 그 계장 눈에 들었던가 봐요. 하루는 계장이 순실이 졸라댔어요. 처음엔 순실이 아버지도 그렇게 탐탁하게 생각지 않았지만 워낙 끈질기게 들어붙자 아바이도 그만 손들고 말았디요. 두 사람은 결국 혼인식을 올리게 되고 아바이가 돌아가시자 허 사장이 공무원 생활을 청산하고 아주 그 회사를 맡아 버렸죠."

“말하자면 처가 재산으로 사장이 된 셈이군요.”
“허지만 허 사장도 만만한 사람은 아니지요. 젊을 때 고등고시에 합격해서 새파란 젊은 나이에 계장님이었다니까요.”
“두 분 사이에 아이는 없었나요?"

“왜요, 아들 하나가 있는데 지금 군대에 가 있어요. 그 아파트엔 두 부부만 살았디요. 두 부부가 쓸쓸하긴 했겠지만 같은 년은.......”
나는 더 이상 듣지 않고 일어섰다. 그 뒤는 공장장 신세타령이 나올 것이 뻔했다.
나는 괜히 시간만 낭비했다고 후회하며 아파트촌으로 다시 갔다.

나는 우선 화분이 떨어졌을 것으로 보이는 2, 5, 6, 7, 8층의 각 8호 가정을 취재하기 시작했다.
2층에는 대학에 다니는 여대생이 고교에 다니는 여자 동생을 데리고 살고 있었는데, 여름방학이라 보름 전에 집에 가고 없었다. 그렇다면 그 호수는 빈집이었으니까 용의점에서 벗어났다.

508호는 두 부부와 국민학교에 다니는 남매가 있는 가정이었다. 그런데 이 집에서 나는 중요한 단서 하나를 발견했다. 이 집 공장에서 만드는 봉제품 인형을 사다가 구미 등지로 팔고 있는 조그만 수출상이었다. 배순실 부부가 이 아파트에 온 것도 박윤준 사장의 권유였다고 한다. 나는 박윤준 씨의 아파트에 다짜고짜 들어가 보았다. 문이 잠기지도 않고 열려 있었다. 마루에서 열한두 살 되어 보이는 꼬마가 공포에 질린 채 나를 쳐다봤다. 낯선 침입자에 대한 공포와 경계였다.

“아, 아저씨 나쁜 사람 아냐. 어머니 어디 가셨니?”
아이는 고개만 가로저을 뿐 여전히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았다.
“아버지는?”
“회사 가셨어요. 지금 저 혼자 집 보고 있는 거예요.”
뒷걸음질을 쳤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냥 나왔다. 다음 608호 가정을 수소문해 보았다. 그 집은 신혼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사건 나기 전 날 부부가 함께 제주도로 바캉스를 떠났다고 한다.
708호엔 노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배순실과 아무런 연관성도 찾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 남은 808호. 이 집은 배순실과 동창생이며 봉제공장 공장장인 김형자의 집이었다. 김형자는 남편과 이혼하고 그 소생인 딸 둘도 남편한테 뺏긴 채 이혼 위자료로 받은 돈으로 이 아파트를 사서 살고 있었다.

그렇다면 용의 아파트 중, 1층과 비어 바캉스 가고 없는 608호를 빼면 나머지는 박윤준 사장이 사는 508호와 노부부가 사는 708호, 김형자가 사는 808호가 남는다. 그 중 노부부는 배순실과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으니 우선 제외하면, 나머지 용의자는 남편 허벽과 박윤준 사장, 김형자 공장장 등 세 사람이 남는다.

이 세 사람은 무엇인가 배순실을 죽일 만한 이유가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남편 허벽은 사건 시간에 헬스 클럽에 있었다고 하니 일단을 알리바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좀더 자세한 것을 알기 위해 수사본부인 반포파출소로 추 경감을 만나러 갔다.
“아니, 임 기자는 이 사건에 아주 재미를 추 경감은 무언가 열심히 도표를 그리고 있다가 예의 주름살 투성이 웃음을 얼굴에 가득 담고 웃었다.


[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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