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군사반란 재판서 모두 ‘유죄’ 하지만 즉시 사면

‘서울의 봄’ 영화 주인공 전두광의 모습. [공식 홍보영상 갈무리]
‘서울의 봄’ 영화 주인공 전두광의 모습. [공식 홍보영상 갈무리]

[일요서울 | 이창환 기자] ‘서울의 봄’이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순위 9위에 올랐다. 지난 2월29일 기준 1312만5483명이 영화를 관람했다. 여전히 상영 극장이 남아있고, 예매가 가능해 관람객 수는 조금씩 늘고 있다. ‘서울의 봄’이 1000만 관객을 동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영화를 직접 관람한 관객들에 따르면 화려한 출연진도 그 역할을 했으나, 그와 더불어 사실에 가까운 현실감을 드러내 보는 이들이 직접 역사의 현장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는 데 있다. 군사반란으로 불리는 신군부의 불법적 병력 동원과 그 배경이 잘 설명된 것으로 평가받는 이 영화에서도 놓치지 않고 있는 것은 쿠데타 세력의 주요 인물이었다. 영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실제 쿠데타를 성공시킨 전두환 등 반란군 주요 5적(敵)과 쿠데타 이후 그들의 삶을 살펴봤다. 

다른 삶을 살다 간 두 사람… 전두환의 통장 vs 노태우의 사과
황영시·차규헌·유학성 모두 대장 예편 후 고위 공직자로 퇴직

1979년 10월26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면서 영원할 것만 같았던 유신정권이 내리막으로 치닫게 됐다. 이에 최규하 당시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제주도를 제외한 비상계엄을 선포하게 된다. 훗날 역사는 신군부가 군 지휘권을 갖게 된 것이 이날의 부분 비상계엄 선포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전국적인 비상계엄과 달리 부분계엄은 사실상 대통령이 군 통제권을 보유하지 않고 국방부 장관이 지휘감독 하도록 돼 있어서다. 즉 신군부 입장에서는 쿠데타를 일으킬 권한과 기회가 한 번에 넘어온 것이었으며, 결국 이런 상황이 12.12 군사반란의 구체적 배경이 됐다.

‘서울의 봄’에서는 1979년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규가 박 대통령을 시해한 이후로부터 영화가 시작된다. 영화가 보여준 당시를 돌아보면 실제로 계엄이 선포되면서 꾸려진 계엄사령부의 합동수사본부장에 임명됐던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은 권력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전두환은 이때부터 철저히 권력 장악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고 자신과 철저하게 동행하며 따르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동조했던 주요 인물 가운데 첫 번째가 군사정권 이후 첫 직선제로 선출된 노태우 대통령이었다. 그는 전방 부대 1개 연대를 동원해 반란을 성공시키는 데 공을 세우면서 훗날 전두환과 나란히 쌍두마차로 불리기도 했다. 

반란군 세력은 밤새 쿠데타를 성공시킨 직후 날이 밝자, 군내 인사를 발표했다. 또 그로부터 하루 뒤인 14일 기념사진 촬영을 통해 쿠데타 성공에 공을 세운 주요 34인의 기록을 사진으로 남겼다. 이 중 맨 앞줄 가운데서 눈에 띄는 인물들이 바로 노태우, 전두환, 차규헌, 유학성, 황영시 등 군사반란 주요 5인이다. 이들은 모두 나란히 내란사범으로 구속된 바 있다.

쿠데타 이후, 반란군의 삶과 죽음

전두환은 육사 11기로 육군 내 비밀 사조직인 하나회 멤버였으며, 12.12 군사반란의 총 지휘자였다. 그는 쿠데타 성공 이후 최규하 대통령이 사임하게 만들고, 곧 11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후 7년 단임제 대통령제를 도입해 12대 대통령에 올라 제 5공화국을 탄생시켰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 정권에서 역사바로세우기에 의해 노태우 등과 함께 구속기소당해 1심 사형, 2심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으나, 15대 대통령선거 국면에 사면됐다. 

그로부터 2021년 사망 직전까지 여론의 뭇매를 맞은 바 있는데 군사반란과 뇌물수수 등으로 기소된 이후 2200억 원의 추징을 당했으나, 한 푼도 내지 않으면서 “통장에 29만 원 밖에 없다”고 언급했던 일화가 유명하다. 더불어 5.18 민주화 운동 당시 무력진압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고, 추징금 환수를 위해 압류된 미술품들이 총 72억 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지난해 전두환의 손자 전우원이 미국으로부터 귀국 후 광주를 찾아 5.18 묘역에서 참배하고 유가족들에게 사죄한 소식은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사죄를 두고 나온 한 여론 조사에서 절반이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결과를 보이기도 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전두환의 육사 동기로, 전두환 집권 이후 민주정의당 총재를 거쳐 대선에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을 누르고 당선됐다. 전두환과 달리 국무회의 등을 포함한 다양한 회의로 자유로운 의견을 수렴하기도 했고, 구소련(러시아)을 비롯한 북방정책을 성공적으로 평가 받았다. 또한 5.18 관련 문제를 사과하고, 추징금도 완납했다. 

특히 노 전 대통령 사망을 전후해 그의 아들인 노재헌 씨는 언론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광주와 관련해 마음의 큰 짐을 졌다고 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더불어 노 씨는 아버지를 대신해 5.18 국립묘지를 참배하기도 했는데 이는 5.18 무력 진압에 책임 있는 관계자 및 직계 가족 가운데 처음이다.

유학성· 차규헌· 황영시

유학성은 군사반란 당시 육군 중장으로 전두환보다 상관이었다. 하지만 전두환을 따라 군사반란에 가담하며, 그 공을 인정받아 제3야전군사령관을 맡았다. 12.12 군사반란 이듬해 육군 대장으로 진급하고,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한 뒤 예편했다. 1985년부터 12대, 13대, 14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1993년 김영삼 대통령 취임과 함께 공직자 재산 공개 제도가 도입되자 사퇴했다. 

1996년 12.12군사반란 및 5.18 민주화운동 관련 재판에서 1, 2심 연거푸 유죄 선고를 받았으나, 대법원 재판 중이던 1997년 지병으로 향년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대법원 확정 판결을 2주 앞두고 사망하면서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유일하게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현재까지도 각종 단체들로부터 국립묘지 안치에 대한 논란이 있다. 

다음으로 차규헌 전 교통부장관. 그는 육사 8기로 전두환의 선배이면서 동시에 12.12 군사반란에 자신의 앞선 경험을 토대로 전두환에게 도움이 됐다. 앞서 이승만 정부 이후 혼란한 틈을 타 박정희 당시 육군 소장이 일으킨 5.16 군사정변에 참여하며, 역사적으로 두 차례 쿠데타에 동참한 인물로 이름을 남겼다. 이때 얻은 경험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군사반란에 도움이 됐다.

수도군단장 재임 중 12.12 군사반란에 동조해, 전두환 집권 후 대장으로 진급하며 2군사령관으로 예편했다. 이후 교통부장관을 역임했다. 노태우 정부 당시 제5공화국 비리 청산 과정에서 첫 구속됐다. 이후 김영삼 정부의 12.12 군사반란에 의한 내란죄 등으로 구속됐으나, 1997년 12월 특사로 풀려났다. 2011년 향년 82세 나이로 사망했다.

마지막 인물은 황영시, 그 역시 전두환의 선배로 육사 10기다. 1군단장 재임 중 12.12 군사반란에 가담했으며, 쿠데타 뒤에 육군참모차장으로 자리를 옮긴 후 대장으로 진급해 제3야전군사령관을 거쳐 육군참모총장까지 올랐다. 5.18 민주화 운동 당시 무력 진압을 직접 지시하기도 했으며, 예편 후 11대~ 12대 감사원장을 지냈다. 역시 김영삼 정부에서 군사반란으로 재판 받고 1997년 4월 징역 8년이 선고됐으나, 그해 12월 사면 받았다. 

그는 검찰 조사 당시 무장 헬기를 이용한 무력진압을 인정한 바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2022년 4월 향년 95세의 나이로 사망하기까지 전두환 등 주요 5인의 인물 가운데 가장 긴 생애를 살았다. 육사 출신의 국방취업지원센터장을 지낸 황인락 단장이 그의 자녀로 알려졌다. 

물론 영화 ‘서울의 봄’은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건국대전’이나 ‘길위에 김대중’처럼 다큐멘터리는 아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영화를 만든 김성수 감독은 영화 초입에 ‘이 영화는 실화를 모티브로 창작하였고, 등장인물 및 구체적 사건은 상상에 기초해 각색됐다’고 정확히 언급했다.

이 영화를 봤다는 한 문화인류학계 관계자는 취재진에게 “1000만 관객을 넘어선 것은 우연이 아니다”라며 “감독은 창작이라지만 상당히 고증된 영화였다”라고 말했다. 더불어 “관람하고 나서 마음이 개운한 영화는 아니었다”라면서도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던 역사적 사실을 영화를 통해서라도 갈증을 풀고 싶은 본능이 1000만 명의 관객을 불러 모은 게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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