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희’ 조작 주장…해군기지 반대도

[일요서울Ⅰ오두환 기자] “정의구현사제단은 천주교회를 떠나라” “사제단 시국선언 사과해야” “정의구현인가 정치구현인가?”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을 향한 원성이 높다. 지난 22일 군산 시국미사에서 정의구현사제단 전주교구 소속 박창신 신부가 “NLL(북방한계선)에서 한·미 군사훈련을 하면 북한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쏴야죠. 그게 연평도 포격”이라며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한 일이 발단이 됐다. 이후 박 신부의 발언은 국내 전 언론매체를 장식했고 ‘종북’이란 단어가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정의구현사제단의 발언은 정치권에도 큰 파장을 미쳤다. 결국 여야는 사제단에 대한 종북 논란을 시작으로 황찬현 감사원장 후보자 임명동의안 단독처리 문제가 겹치며 급속히 얼어붙었다.

독재시대에는 민주화·인권운동의 보루 역할
2000년대에는 반미·통일 등 정치세력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역사는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4년 7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가 ‘유신헌법 무효' 양심선언을 한 뒤 구속되면서 정의구현사제단이 만들어졌다.

시대의 빛과 소금이
반미·통일·반전운동

공식적인 출범은 같은 해 9월 서울 명동성당에서 시국선언을 하면서부터다. 당시 시국선언에는 김승훈·함세웅 신부를 비롯해 젊은 사제들과 평신도 등 1200여 명이 참여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이후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했고 김지하 시인 구명 운동, 인혁당 사건 진상 규명 운동 등을 전개했다.
독재시대 정의구현사제단은 민주화와 인권의 보루였다. 사회적 약자는 물론이고 정치적 희생자들에게 유일한 기둥이었다. 그러다 1980년대 들어 광주민주화운동과 부천서 성고문 사건 진상 규명 운동을 통해 위상이 더욱더 높아졌다.
정의구현사제단의 명성은 1987년 5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조작을 폭로하면서 더욱더 높아졌다. 이 폭로로 인해 6·10 항쟁이 시작됐다.
정의구현사제단은 이 시대의 빛과 소금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이념적 성향이 짙어지면서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됐다.
정의구현사제단은 민주화 이후 국가보안법 폐지, 반미, 통일, 반전 운동 등으로 방향을 틀었다. 대표적인 사건은 1989년 8월 미국에 있던 문규현 신부를 불법 입북시켜 평양 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임수경양과 함께 귀환시킨 일이다. 당시 문 신부는 정부의 허가 없이 북한에 들어갔다.
2000년대 들어서는 2002년 11월 미군 장갑차 여중생 희생 사건 해결과 소파협정(한·미 행정협정) 개정을 요구하는 시국기도회를 열어 주목을 받았다. 2003년 11월에는 1987년 발생했던 KAL 858기 사건이 조작됐다며 진상 규명을 요구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끈 10년의 진보 정권이 끝나고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정치참여 및 세력화를 강화했다. 이후 국가보안법 폐지,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 한·미 FTA 중단을 촉구하는 시국미사를 개최했다. 미국산 소고기 수입 재협상 요구 촛불 시위,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 용산 사태 등에 개입하면서 좌경 성향을 보여 친북, 종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정의구현’ 사제 수
전국에 약 500여명

정의구현사제단은 서울에 본부를 두고 천주교 교구별로 지부를 갖고 있다. 본부와 지부에 각각 대표가 있다. 사제단은 정확한 회원 수와 명단을 발표한 적이 없지만 대략 300~500명이 회원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국 천주교의 전체 사제는 지난해 말 4578명이다.
현재 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는 지난 3월 선출된 나승구(50) 신부가 맡고 있다. 나 신부에 앞서 전종훈(57) 신부가 7년간 대표를 맡았다. 이들과 2007년 삼성 비자금 폭로 당시 사제단 총무로 매스컴을 탔던 김인국(50) 신부와 김홍진(57), 맹제영(55), 이강서(51), 최승정(52) 신부 등이 ‘사제단 2세대'의 핵심이다.
50대 신부들이 실무 책임을 맡고 있지만 정의구현사제단의 실질적 주역은 여전히 창립 때부터 참여해 온 원로 그룹이다. 김승훈 신부는 2003년 세상을 떠났지만 함세웅(71) 신부는 정의구현사제단이 설립한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원장으로 사제단의 대부 역할을 하고 있다. 연구원 이사장인 김병상(81) 몬시뇰과 부이사장인 송기인(75) 신부, 이사를 맡고 있는 심용섭(74), 안충석(74), 양홍(73), 황상근(72) 신부 등도 ‘사제단 1세대'로 불린다.
정의구현사제단은 한국 천주교의 공식 지도 기구인 주교회의로부터 인준받지 않은 임의 단체다. 천주교는 모든 산하단체가 주교들의 통제를 받지만 사제단은 그렇지 않다. 이러다 보니 자신들의 뜻에 맞지 않을 경우 천주교 최고 지도부더라도 반기를 든다.

지나친 좌경화
정치 세력화는 금물

정의구현사제단이 갈수록 좌경화되고 정치 참여가 많아지자 이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늘고 있다. 보수 시민단체의 항의는 물론 종교에 대한 거부감으로 시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일도 발생하고 있다. 
먼저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는 24일 군산 시국미사 논란에 대해 “가톨릭 교회는 사제가 직접 정치·사회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며 “(신부들) 자신이 하느님처럼 행동하고 판단하려는 교만과 독선은 더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홍재철 목사도 26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시국미사에서 나온 ‘대통령 사퇴’나 ‘북한군 연평도 포격 정당성’의 발언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경악을 금치 못할 말이며 지탄받을 수밖에 없는 행동"이라고 밝히며 정의구현사제단 해체를 촉구했다.
새누리당 정우택 최고위원은 28일 최고위원회 회의에서 “저들의 극단적 행동은 종북세력이 이석기 의원 등에 그치는 게 아니라 사회 전반에까지 퍼져 있음을 국민이 알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이명박 정권 때 촛불과는 달리 현재의 대선불복은 이념에 기반을 두고 있어 확산에 한계가 있지만, 양극화 현상과 취업난 등 고조되는 경제 불안과 연계되지 않도록 국정관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사회적 분열을 야기하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정홍원 국무총리 역시 “박 신부의 발언은 대한민국을 파괴하고 적에 동조하는 행위”라며 적극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다.
정의구현사제단을 향한 날선 비판이 종교계 내부를 벗어나 정치권에서도 큰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특히 민주당과 새누리당은 사제단의 종북성향 발언을 두고 끝없는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실정이다.
반면 민주당과 일부 시민단체들은 정의구현사제단에 대한 “종북몰이 덮어씌우기를 그만하라”며 “탄압을 중단하라”고 외치고 있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이들의 목소리는 “고요속의 외침”일 뿐이다. 그동안 정의구현사제단의 시국 발언들이 일반인들의 상식을 뛰어넘는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한 교황청대사관에
파문건의 고발 접수

이런 가운데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박창신 신부에 대한 ‘파문 건의’ 고발장이 주한 교황청대사관에 제출된 것으로 확인됐다.
고발장을 접수한 단체는 천주교 평신도 모임인 ‘대한민국수호천주교모임’이다. 대한민국수호천주교모임은 “(정의구현사제단의 시국미사는) 좌편향적 정치선전과 종북 행동”이라며 강하게 비판한 뒤 서울 종로구 궁정동에 있는 주한 교황청대사관으로 이동해 박 신부의 파문을 건의하는 내용을 담은 고발장을 제출했다.
국내 단체가 주한 교황청대사관에 파문 건의서를 전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교황청에서 이 고발장을 접수해 통과시킬 경우 박 신부는 파문을 당할 수도 있다. 가톨릭 교회에서 파문은 교회 공동체에서 축출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지난 26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제로서의 훈계’를 통해 양극화 문제 등을 언급하며 사제들에게 적극적 현실참여를 당부했다. 교황은 먼저 “돌이킬 수 없는 비인간성의 시대로 접어드는 상황에서 동시대 현실을 분석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중요한 책무”라고 밝혔다. 또 “교회는 사회통합과 인권·시민권을 둘러싼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해결책을 찾아내는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필요하다면 신발에 거리의 진흙을 묻힐 수도 있어야 한다”고도 했다. 교황 스스로 사제들의 현실 참여를 당부한 마당에 파문 건의서가 통과되기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박창신 신부
발언의 진의는?

지난 22일 군산 시국미사에서 박창신 신부가 한 말의 핵심은 국정원의 대선 개입이 커다란 부정선거였고 그 혜택의 일부로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됐으니 퇴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발언 이후 북방한계선과 연평도 포격사건을 이용한 새누리당과 정부의 종북몰이를 비판했다. 하지만 새누리당, 극보수주의자, 현 정권은 반대로 박 신부와 정의구현사제단을 종북주의자로 낙인찍었다. 이 단체가 좌경화 성향을 띠고 있고 당시 발언이 과격했던 점은 사실이지만 종북몰이로 몰아가는 것은 국내 정치·사회 환경을 더욱더 혼란 속에 빠뜨리는 일이다. 이미 박 신부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강론의 취지를 왜곡하고 있다. 장기집권하면 문제가 생기고 폐해가 생긴다. 그게 북한이다. 왜 북한을 좋아하겠나”라고 반문했다. 더 이상의 종북몰이는 무의미하다. 하지만 정의구현사제단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다시 한 번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freeore@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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