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할머니의 죽음

며칠 뒤 서연이 조교실에서 세종조의 안평대군이 살던 무릉도원의 기록을 뒤적이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걸려온 전화 번호를 보니까 모르는 번호였다. 모르는 전화번호가 뜨면 서연은 항상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서연은 안 받을 수도 없어 모바일을 열었다.

“여보세요. 장서연인데요.”
-장서연 씨입니까? 여기는 광주경찰서 남종면 지구대인데요.
“녜? 남종면이라고요?”
남종면은 고향집 분원리가 있는 면이었다.

-저어, 서숙정 씨 따님 맞습니까?
서연이 처음엔 서숙정이 누군지 얼른 알아듣지를 못했다. 한참 생각해 보니 할머니였다.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할머니 이름이었다. 그러나 할머니 이름을 듣자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예. 맞습니다만. 제가 서숙정의 딸인데요. 무슨 일입니까?”
-놀라지 마십시오. 할머니께서 어젯 밤에 일을 당하셨습니다. 빨리 좀 집으로 내려오셔야겠습니다.

경찰관은 감정이 없는 기계음처럼 차가운 음성으로 엄청난 소식을 전했다.
“뭐라고요? 할머니가 어떻게 되셨다고요?”
-돌아가셨습니다.

여전히 차가운 기계음이 귓전을 때렸다. 서연은 충격으로 눈앞이 캄캄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핸드폰이 손에서 슬그머니 풀려나 연구실 바닥에 금속성을 내며 떨어졌다.
정신을 가다듬은 서연에게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차형준이었다.
“오빠! 할머니가...할머니가....”

휘청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는 서연을 보자 형준이 서연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
“서연아. 정신 차리고 천천히 말해봐. 할머니가 어떻게 되셨어?“
“할머니가 돌아가셨어. 형 이일을 어떻게 해.”

형준은 서연과 대학원 같은 과지만 군대 갔다 오느라 늦었을 뿐, 나이는 세 살이 많아 오빠라고 불렀다.
“경찰서라면서 전화가 왔어. 어쩌면 좋아.”
서연이 다시 팔짝팔짝 뛰었다.

“그럼 빨리 경찰서로 가보자. 내가 차를 가지고 나올 테니 교문 앞으로 나와!”
형준은 평소 느긋하게 움직이는 스타일이었으나 이번만은 서둘렀다.

서연과 형준이 분원리 집에 도착했을 때 낯선 광경이 보였다. 집 앞에 경찰 순찰차가 여러 대 서있었다. 그뿐 아니라 ‘감식’이라고 쓴 검은 색 큰 차도 보였다. 집 대문 앞에는 ‘폴리스 라인’이라고 쓴 노란 띠가 둘러져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할머니! 할머니!”

서연이 왈칵 울음을 터뜨리며 대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진정해. 서연아...”
형준이 뒤따라오며 서연의 팔을 잡았다.

“장서연 씨? 손녀 되십니까?”
마당 가운데 서 있는 점퍼차림의 중년 남자가 서연을 보고 물었다.
“예. 제가 서연이예요. 서숙정 씨의 손녀예요.”
중년 남자가 침착하게 서연을 대청마루에 앉도록 권했다.
“할머니는 어디 계세요?”

서연이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물었다.
“우선 눈물부터 닦으세요. 나는 남종 경찰서 강력계 지훈 형삽니다. 할머니는 지금 남종종합병원에 있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게 정말인가요. 다치신 게 아니고...”
“예. 할머니는 아침에 옆구리와 가슴을 칼에 찔린 채 마당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동네 할아버지가 지나가다 발견했을 때는 이미 사망한 뒤였습니다.”
“누구예요? 누가 우리 할머니를...”
서연이 통곡을 했다.

“누나. 울지마.”
동생 석현이가 방안에서 뛰어나와 누나를 쓸어안고 말했다.
“동생은 안방에서 묶인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범인은 동생을 테이프로 입을 막고 팔과 다리를 꽁꽁 묶어 꼼짝 못하게 해 놓고 할머니를 해친 것입니다.”
지훈 형사가 대충 설명을 했다.

분원리 서숙정 피살 사건은 초동수사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빈한한 시골 집에 들어와 아이를 묶어 놓고 할머니를 살해했는지, 동기를 찾을 수 없었다. 몇 가지 이상한 점이 있기는 했다. 집안을 전혀 뒤진 흔적이 없기 때문에 강도로 보기는 어려웠다. 원한을 살만한 이유도 물론 없었다. 또 한 가지 이상한 점은 마당 구석 여러 곳을 파헤친 흔적이 있었다. 그뿐 아니라 시멘트로 덮인 장독대에 깊숙한 구멍이 여러 개 뚫려 있었다.  휴대용 굴착기 같은 것으로 뚫은 것 같았다.

감식반은 지문 채취로 단서를 얻지는 못했지만 장독대 옆에서 벗어놓고 간 것으로 보이는 무명 목장갑 한 켤레를 발견했다. 손바닥에 붉은 칠이 있는 작업용 헌 장갑이었다.

경찰은 장갑에서 꼈던 사람의 DNA 채취에 성공하여 국과수에 보냈다. 의심 가는 용의자가 있으면 대조를 해 보기 위해서였다.

서연의 동생 석현이도 범인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키가 큰 남자였다는 것 밖에 기억하지 못했다 자다가 할머니의 비명 소리에 깨어나자 마자 시커먼 남자가 입을 틀어막고 묶어버렸기 때문에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범인이 혼자라면 할머니가 비명을 지르게 한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형준이가 석현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모르겠어요. 할머니의 비명은 마당에서 들렸어요.”
 서연은 그렇다면 범인이 두 명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밤중에 들어와서 할머니를 찌르고 장독대에 구멍을 뚫은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경찰은 범행 현장을 샅샅이 감식했으나 범인의 흔적은 찾지 못했다. 방안을 뒤진 흔적이 없기 때문에 문고리나 벽 같은 데서 수상한 지문도 발견하지 못했다. 다만 석현이의 입을 가렸던 테이프에서 지문 두개를 발견했으나 누구의 것인지 밝혀내지는 못했다.

 이튿날 서연의 외가에서 외삼촌 한 분이 올라와서 집을 지켜주었다. 추영희와 형준이도 분원리 집에 와서 함께 있어주었다. 아예 잠까지 함께 자주었다. 같은 동아리 멤버였던 김명섭도 같이 잠을 자지는 않았지만 낮에 잠깐씩 집에 들러 서연을 위로해 주었다.

 할머니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부검을 끝낸 뒤 분원리의 선산에 매장하고 집 건넌방에 빈소를 마련했다.
 
 서연이 할머니 장례가 끝나고 허탈한 마음으로 집을 지키고 있을 때 추영희가 찾아왔다.

 “서연아. 마음을 단단히 먹어라. 석현이를 돌봐야지.”
 “고마워 영희야. 그런데...”
 서연은 영희와 같이 온 사람을 보면서 말을 얼버무렸다.
 “음, 이분은 우리 삼촌이야. 추경감이라고 옛날 경찰에 계실 때 명 수사반장이었지. 지금은 은퇴했지만...”

  삼촌은 덥수룩한 수염에 흰 털이 듬성듬성 섞인 얼굴로 인자한 미소를 띄우며 서연을 건너다보았다. 얼굴은 주름투성이였으나 편안하고 너그러워 보였다. 날카로운 수사반장의 이미지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서연아. 얼마나 힘들겠느냐. 그래도 마음을 꿋꿋이 먹어라.”
“예. 마루에 좀 앉으세요. 영희가 늘 말씀 많이 들었어요.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서연이 자리를 권하자 추경감이 마루에 걸치고 앉았다. 낡은 구두가 먼지투성이였다.
 “하도 답답해서 삼촌에게 좀 도와 달라고 했어. 옛날에는 날리시던 명탐정이었으니 혹시 너한테 도움이 될까 해서...”

 서연은 그제야 추경감이 불쑥 나타난 이유를 알았다.
 “지금은 수사 방법이 옛날과 많이 다르고 뛰어난 수사관이 많아 내가 무슨 도움이 될까마는... 그래도 놀기도 너무 지겹고 해서....”
 추경감은 몹시 겸연쩍어하면서 말했다.

 “내가 오다가 경찰서 수사본부에 들러서 이야기는 대강 들었지. 지훈 반장은 내가 경찰에 있을 때 초년병이었는데 지금은 명수사관이더군. 하하하.”
 추경감은 서연이 내다주는 냉수 한잔을 들이킨 뒤 이거 저것을 물어 보았다. 그 때 마침 명섭이와 형준이가 시골서는 보기드문 파인애플을 사들고 들어왔다. 워낙 커서 형준이가 낑낑댈 정도였다.

 서연과 영희가 먹음직한 파인애플을 잘라 쟁반에 담아왔다. 냉동이 되지 않아 미지근하기는 했으나 새콤한 맛이났다.
 “저기 장독을 뚫은 도구는 콘크리트 벽을 뚫는 전기 천공기 같은데 전선을 이은곳은 여기 마루 벽에있는 플러그 같군...”

 “콘크리트 깰 때 쓰는 것 아닌가요?”
 김명섭이 말했다.
 “아니야. 벽을 뚫을 때 쓰는 도구야. 전기공사 하는 사람들이 쓰는 것이지.”
 “그리고 각각 다른 두 사람의 신발자국을 발견했다고 하더군. 그러니까 두 사람이 들어온 것이 틀림없어.”

 추경감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아무 값나가는 재산도 없는 우리 집에 들어와 할머니를 해치고 장독을 뚫어놓고 갔을까요?”
 서연의 말에 형준이 맞장구를 쳤다.

 “이런 게 미스터리라는 것이지.”
 “사건이 나기 전에 혹시 이상한 일을 할머니에게서 들은 것 없나?”
 추경감이 서연을 보고 물었다.
 “별 일은 없었던 것 같아요. 있다면...”

 서연이 생각난 듯이 잠깐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
 “읍내 부동산 중개소에서 갑자기 사람을 데리고 와서 이 집 팔지 않겠냐고 물었대요.”

 “집을 내 놓은 것도 아닌데?”
 추경감의 눈이 갑자기 반짝거렸다.“
 “예. 2백년 대대로 살아온 집인데 팔긴 왜 팔겠어요.”
 “값을 시세보다 듬뿍 높여 쳐줄 테니 팔라고 하더래요.”
 형준이 거들었다.

 “같이 왔다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래?”
 추경감이 몹시 구미가 당기는 것 같았다.
 “그건 물어보지 않아서 전혀 몰라요. 안 팔 테니까 다시는 오지 말라고 해서 보냈대요.”

 “그게 읍내 어느 중개소인지 알아?”
 추경감이 물었다.
 “전혀 모르지요.”
 그때였다. 방안에 혼자 있던 석현이 나오며 말을 했다.
 “그때 부동산 중개소 아저씨가 두고 간 명함이 여기 있어요. 할머니가 받아서 그냥 던져 둔 거예요.”

 석현이 명함 한 장을 들고 왔다.    
 추경감이 얼른 명함을 받아 쥐었다.
 “땅부자 중개소? 아주 중요한 단서야. 이 집에 무엇인가 비밀이 있어. 그래서 이 집을 사들이려고 한 거야. 팔지 않으니까 그 비밀을 캐러 밤중에 들어왔을지도 몰라.”

 이튿날 서연은 다시 찾아온 추경감과 함께 읍내의 ‘땅부자’ 중개소를 찾아갔다. 깔끔하게 정리된 사무실은 중개소 답지 않게 세련된 인테리어가 눈에 띄었다. 젊은 남자가 혼자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인사를 건넨 뒤 추경감은 살인 사건이 난 서연이네 집에서 왔다는 것을 알리고 전에 집을 사러 왔던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뜻밖의 일을 당하셔서 얼마나 참담하십니까.”
 젊은 남자는 공손하게 절을 하며 조의를 표했다. 그리고 뜸을 들인 뒤 역시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집을 내 놓으시려는 군요.”
  “그게....”
 서연이 말을 하려고 하자 추경감이 가로막았다.
 “예. 전에 둘러보고 가신분이 값을 후하게 쳐 준다고 하셨는데요.”
 “아아, 그 사람 말입니까. 그 뒤에는 연락이 없었는데...”

 “다시 연락하는 방법이 없습니까?”
 추경감이 젊은 남자가 입 열기를 기다렸다.
 “잠깐 계셔 보세요. 서울에 있는 중개소에서 보낸 고객이었거든요.”
 남자가 전화를 걸었다. 아마도 서울 중개소 사람과 통화하는 것 같았다.
 한참 통화를 한 뒤 젊은이가 입을 열었다.

 “다시 연락을 준다고 합니다.”
 “서울 중개소를 알려주면 우리가 직접 가보겠습니다. 대신 계약을 할 때는 반드시 이곳에 와서 하겠습니다.”
추경감의 제의에 한참 생각하던 젊은이가 명함 한 장을 꺼내 주었다.
 ‘중개사 박종휴’

 주소는 인사동 네거리로 되어 있었다.
 “성사가 되면 꼭 여기로 오셔야 합니다.”
 젊은이가 다짐을 하듯이 말했다.
 “물론입니다. 그런데 그때 집을 보러 오신 분 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글쎄요. 자세히 보지는 않았는데 큰돈을 가진 것 같지는 않았는데요.”
 “예?”

서연이 되물었다.
 “서른 살 정도의 청년이었는데 얼굴이 깡마르고 도끼눈을 한 박복한 얼굴이었거든요. 허술한 점퍼차림에...”
 “하하하. 사람을 의복이나 얼굴보고 평가할 수는 없지요.”
 추경감이 특유의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관상 공부를 좀 했거든요. 척보면 복이든 관상을 알아봅니다.”
 젊은 남자는 웃지도 않고 말했다. <다음호에 계속>
 

이상우; 추리소설과 역사 소설을 50여 년간 써 온 작가다. 60여 년간 일간신문 기자, 편집국장, 회장 등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기자의 눈으로 본 세상사를 날카롭고 비판적인 필치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다. 1983년 한국추리작가협회를 창설하고 현재 이사장을 맡고 있다. 역사와 추리를 접목한 그의 소설은 4백여 편에 이른다. 한국추리문학 대상, 한글발전 공로로 대한민국 문화 포장 등 수상.

50판 까지 출판한 초베스트셀러 <악녀 두 번 살다>를 비롯, <신의 불꽃>, <여섯 번째 사고(史庫)> <역사에 없는 나라>, <세종대왕 이도 전3권> <정조대왕 이산>, <해동 육룡이 나르샤>, <추리소설 잘 쓰는 공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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