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낭만적이 못 되었습니다. 경감님.”
조준철도 곽 경감의 느닷없는 웃음소리를 듣자 말에 조금 여유가 생긴 것 같았다.
“그들은 계속해서 끔직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 쓸데없이 탐정 흉내를 내고 있는데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 줄 아느냐? 그런 일은 경찰에 맡기고 공부나 열심히 하는 것이 좋다. 오늘밤 이후에도 쓸데없는 짓을 계속 하고 다니면 네가 인턴으로 있는 병원의 네 환자들이 이유 없이 연속으로 죽어 나갈 것이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너도 사고로 병신이 되거나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아이 끔찍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그들이 알고 있었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하지만 그들이 누구를 죽인 것은 분명해요.”
“어떻게 그렇게 단정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무엇 때문에 나한테 그런 협박을 하겠어요?”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주잔만 계속 입에 털어 넣었다.
“그 괴전화 02, 9999, 4882와 관계가 있지 않을까요?”
한참 만에 조준철이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에는 말야⋯”
곽 경감은 잠시 말을 끊고 포장마차 아주머니를 슬쩍 보았다. 부지런히 칼질을 하는 아줌마의 볼륨 있는 유방이 육감적으로 출렁거렸다.

“내 생각에는 말이야 조은하씨 피살 사건의 배후에는 모종의 정치적 음모가 숨겨져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 확실하게는 모르겠지만, 정치적 배경을 가진 여러 갈래의 조직이 개입된 것 같아.”
“여러 갈래의 조직이라구요?”
조준철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적어도 두 개 이상의 다른 입장을 가진 조직이 개입된 것 같아. 조은하씨가 평소 정치적인 세력과 접촉을 하고 있지는 않았나?”
곽 경감이 입으로 가져가던 잔을 멈추고 조준철을 바라보았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누나는 세상이 싫어 숨어 살다시피 한 분입니다. 시골에 묻혀 초등학교 학생과 더불어 세월을 묻고 있었습니다. 그런 누님이 무슨 야망이 있다고 정치세력과 접촉을 한단 말입니까?”

조준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가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도저히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는데⋯”
곽 경감은 아주머니가 구워 내 놓은 가짜조기를 열심히 뜯어먹었다.
“어쨌든 우리를 협박한 녀석들이 정부 정보조직인지 사조직인지 그것부터 알아 내야해. 조준철씨는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어요.”

곽 경감이 정색을 하고 조준철에게 술잔을 건너 주었다.
“나봉주 말이야.”
“봉주요? 봉주 소식을 알고 계세요?” 
조준철은 곽 경감이 진지한 투로 나봉주의 이야기를 꺼내자 깜짝 놀라며 물었다.
“아니, 그렇게 흥분하지 말고 내 얘기 잘 들어. 나봉주는⋯” 
조준철은 긴장된 눈빛으로 경감을 바라보았다.
“나봉주가 강속구와 한패거리야.”

“예?”
조준철이 너무 놀라 술잔을 떨어뜨릴 뻔 했다.
“정말이야 내가 납치되어 갔던 뉴페닌슐라호텔에 그 여자가 있었으니까 말이야.”
“맙소사!”
조준철은 입을 딱 벌리고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이야기를 왜 이제야 하는 겁니까?”

조준철이 따지듯이 말했으나 곽 경감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날 밤 그들은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할 정도로 술을 마신 뒤 헤어졌다.
그 다음날 곽 경감에게는 뜻밖의 일이 생겼다.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국장실에 불려간 곽 경감은 놀라운 지시를 받게 되었다.

“추병태 경감! 이건 극비 차출이요.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말고... 해외 출장으로 처리 할 테니 곧장 치안본부 제4부장에게로 가 보시오.”
뜻밖의 명을 받은 곽 경감은 어안이 벙벙했다. 상부에서 극비 속에 수사를 해야될 일이 있는데 그 요원으로 곽 경감을 차출하니,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가라는 것이었다.

“거기서 저는 무슨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까?”
“그건 나도 전혀 모르오. 아마 합동 수사본부 같은 것을 만드는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이일은 이 방을 나선 뒤에는 입 밖에 내면 안 됩니다.”
국장은 몇 번이나 함구령을 내렸다. 곽 경감은 30여년 경찰관 생활을 했지만 이런 일을 당하기는 처음이었다.

곽영도 경감은 국무위원 부인들 피랍 사건의 수사 요원으로 극비리에 차출되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처음에는 본인도 국장도 알지 못했다.
용공단체나 반체제 조직을 검거하기 위한 특수대에, 드물게 정보요원 아닌 수사요원이 동원된 정도로 생각했었다.

18. 산정호수 포위작전

포천 부근에 주둔하는 공수특전단의 여단 규모 병력이 황급히 산정호수 일대에 투입되었다. 그 외각에는 다시 신 철원에 있는 부대 중에서 2개 대대 병력을 동원하여 봉쇄했다.
이렇게 많은 병력을 움직이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육군부 장관으로부터 육군 참모 총장에게로 거기서 다시 군사령부와 군단을 거쳐 사단으로, 혹은 독립 부대로 작전 명령이 떨어지는 데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야만 했다.
김교중 육군 장관은 산정 호수 입구에 있는 관광호텔을 임시 지휘 본부로 삼았다.
“절대로 여기서 작전하는 것이 외부로 노출되어서는 안 돼!”

뒤늦게 달려온 조민석 육참 차장과 성유 육군 정보부장, 그리고 그곳을 맡은 사단장 및 특전 여단장과 지휘부 회의를 끝낸 김교중 장관이 한 번 더 당부를 했다.
육군 참모총장은 미국에서 열리는 연례 국방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출장 중이었다.
호반 호텔로 직접 투입되는 공수 특전여단 중의 1개 소대 병력은 변일근 여단장이 직접 맡기로 했다. 변일근 준장은 월남전에서 무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적의 후방 침투, 폭력 진압 등 특수 부대의 작전에 능통한 노장군이었다. 그는 애국심이 누구보다 강하고 충직하기로 이름난 장군이기도 했다.

“호텔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합니다.”
대대장이 변 장군에게 은밀하게 보고했다. 호텔의 양쪽은 숲으로 쌓여 있고 뒷면은 호수와 닿아있었다. 그러니까 남쪽은 호수이고 동서쪽은 소나무가 우거진 산기슭이고, 북쪽은 정문으로 되어 있어 공격하기가 용이하지 않았다.

변장군의 작전은 양쪽 산기슭을 이용한 특전대의 기습과 호수를 이용한 공격이었다.
그러나 호수로 공격한다는 것은 물밑으로 들어가서 접근하지 않는 한 불가능했다. 변장군은 물위에 떠있는 두 척의 유람선을 무장선으로 바꾸었다. 유람선은 두 시간마다 호수를 한 바퀴씩 돌았다.

“유람선 한 척은 동쪽에서 접근하고 다른 한 척은 서쪽에서 접근한다. 두 배가 동시에 호텔에 닿으면 이상하게 보일 테니까 3분의 간격을 두고 접근한다. 먼저 도착하는 유람선은 갑판과 객석에 서 노래자랑을 위장한다. 큰 소리로 노래와 반주를 내 보내 놈들이 전혀 의심하지 못하게 한다. 배가 호텔에 접근하면 다음 명령을 기다린다.”
변장군은 유람선을 맡은 두 소령에게 자세한 명령을 하달하면서 마지막으로 작전 시간을 일러주었다.
“17시 30분 정각!”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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