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을 듣고 있는 비대위 멤버들은 모두가 공포에 질려 얼굴에 핏기를 잃었다. 정채명 장관만이 표정의 변화 없이 이를 악물고 있었다. “쓸데없는 논쟁할 시간이 없어요. 만나보지 못 하게 될 사모님이 누군지는 우리도 모르오. 아마 제비뽑기로 순서를 정할지 모르오. 어쨌든 다시 한 번 대통령 각하께 전하시오.

대통령 이하 전 내각이 즉각 사퇴하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돌싱들만 모인 국무회의라는 희대의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자, 회답을 기다리겠습니다.”
“여보시오!”

그러나 전화는 딸깍 끊기고 말았다. 그 이후 여섯 시간이 지나도록 민독추의 연락은 끊겼다.

<20화> 아래층의 정사

매스컴들은 저마다 무엇인가가 있다는 냄새를 맡았는지 집요하게 촉각을 세우고 있었으나 아직 아무것도 캐내지는 못했다고 정국장이 보고했다.

“도대체 육군 정보 부대들은 무얼 하고 있는 거요? 의정부 동북방이라면 그건 육군의 앞마당 아니오. 그런데 무장 호위를 받으며 수십 명이 타고 가는 버스를 이리 저리 끌고 다녀도 그 흔적을 찾지 못한단 말이요?”

고일수 법무장관이 소리를 질렀다. 비대위 사무실은 엄숙한 회의장의 분위기는 벌써부터 없었다. 여기 저기 소파 위에 담요가 널려 있는가 하면, 각종 음료수 병들이 책상 위에 뒹굴고 있었다.
비교적 조용히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던 고일수 법무가 더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시간문젭니다.” 

성유 육군 정보부장이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얼룩무늬 특전단 전투복에 권총까지 차고 있었다.
“당신 말이야 누구 겁주는 거야? 여기가 어딘데 권총을 차고 다녀!” 
박인덕장관이 돌파구를 찾았다는 듯이 씩씩거렸다. 성유 부장에게 삿대질을 하며 분통을 엉뚱한데 터뜨리고 있었다.
“박 장관! 말이 지나치지 않아요? 성유 부장은 현역입니다. 군인이 군복 입는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보고있던 김교중 육군장관이 거들었다.
“군복? 현역? 그래 현역 군인들이 군복입고 국무회의 책상에 나타나 이 나라를 어떻게 만들었소?” 

“그 말에는 뼈가 있는데!” 
김교중 장관이 정색을 하고 일어섰다.
그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실내에 긴장이 팽팽해졌다. 조민석 육군 참모 차장과 성유 부장도 긴장한 얼굴로 일어섰다.
“내가 뭐 말 잘못했나?” 

박인덕 장관은 갑자기 달라진 실내 분위기를 의식했는지 말꼬리를 흐리기 시작했다.
“분명히 말 해 보시오! 군복이 이 나라를 망쳐 놓았다는 뜻입니까? 박인덕 장관!” 
김교중 장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때였다.
“자. 그런 논쟁으로 시간을 보낼 때가 아닙니다. 우리 잠깐 눈을 붙이고 다시 모입시다. 아이구 벌써 시계가 10시나 되었구먼.” 
정채명 내무 장관이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애를 썼다.

“그렇습니다! 오늘은 이만 들어가 잠깐 쉬시고 내일 아침에 조찬을 같이 들도록 합시다. 장소는 삼청동 그린에 준비하겠습니다. 여섯시까지 모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정일만 내각 정보국장이 정채명의 장관의 말을 맞받았다.
삼청동 그린이라는 곳은 정보요원이나 각료들이 쓰는 비밀숙소 중의 하나였다. <안가>라고 하는 종류도 이 중의 하나였다.
분위기는 다시 바뀌고 장관들이 슬금슬금 일어서서 깜깜해진 하늘을 바라보며 밖으로 나갔다.

정채명 내무장관이 탄 그랜저는 한강을 건너 개포동 아파트로 들어섰다.
해방이후 60여년 동안 그 많은 격동기를 헤엄치듯 잘 견뎌온 그는 이제 나이 70을 바라보면서 뒤늦게 입각하여 내무장관 자리를 맡고 있었다.

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감투에 눈이 어두워 지조를 지키지 못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대로 정치에 대한 철학과 국가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황해도 재령의 부농집안 태생으로 일정시대 동경에 유학을 하고 돌아온 인테리 청년이었다. 해방이후에는 학교 선생님 등을 지내면서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으나 6.25 이후 야당에 투신하고 맹활약을 했다.

이승만 정권을 공격하다가 용공분자로 몰려 세차래 투옥까지 당했었다.
그러나 서울에서 출마하여 4선 의원이 되는 관록을 세웠다. 여러 공화국을 거치는 동안 반독재투쟁의 맹렬 투사로 이름을 굳혔다.

그는 야당의 부총재까지 이르렀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느 날 갑자기 정계 은퇴 성명을 내고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가 다시 나타난 것은 정권이 바뀐 몇 년 뒤였다.
정채명은 여당의 중견간부로 등장했다.
그의 화려한 야당 경력이나 반정권투쟁의 반생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일에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가졌다.

그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무임소 장관을 거쳐 내무장관에 임명되었다.
불같은 야당시대의 성격은 간 데 없고 온화하고 신중한 태도를 가졌다.
그러나 권력의 핵심에 있는 젊은 장관이나 정보책임자들에게는 항상 의구의 눈길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정채명장관은 집이 있는 개포동 아파트 13동 앞에 도착하자 운전사와 수행 비서를 아파트 입구에서 돌려보냈다.

그가 집안에 비서나 기사를 데리고 들어간 일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13동 엘리베이터를 혼자 탔다. 그의 아파트는 3층이었다, 그러나 그는 3층에 내리지 않고 한 층위인 5층에 내렸다. 이 아파트는 4층이 없기 때문에 3층 바로 위가 5층이었다.

정채명은 아래층의 자기 집과 같은 위치에 있는 506호의 벨을 눌렀다.
문이 열리고 30대로 보이는 여자가 고개만 내밀고 복도를 살폈다. 시간이 밤 11시가 넘었기 때문에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자는 재빨리 정채명의 팔을 나꿔 채 안으로 잡아당긴 후 문을 닫았다.
정채명이 현관에 들어서자 여자는 더 못 참겠다는 듯이 정채명을 끌어안고 얼굴을 가슴에 대고 문질렀다.

“됐어. 됐어!” 
정채명은 여자의 등을 가만히 두드리면서 여자를 가슴에 안은 채 거실로 올라섰다.
“어떻게 된거예요? 연락도 없이⋯” 
여자는 거실에 올라서자 정신이 든 듯 정채명의 웃옷을 받아들며 말했다.
“미안해 수진이⋯” 

정채명은 수진의 등을 밀고 안방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저녁은 어떻게 했어요?” 
수진이 정채명의 옷을 받아 걸고 가운을 내주었다.
“나 샤워 좀 할 테니까 술 좀 꺼내 놔요.” 
정채명은 침실에 달린 욕실로 들어가며 말했다.
수진은 부엌에서 손바닥만 한 판에 로얄살루트 병과 마른안주 몇 가지를 들고 들어왔다.

침대 곁에 있는 푹신한 두 개의 소파 가운데 있는 작은 탁자에 술상을 얹었다.
아네모네 그림 같은 분위기가 방안에 가득 찼다. 침대 덮개의 초록과 남빛이 어울린 무늬며 장식대 위의 자기들이 특히 그랬다.
“아이 시원해.” 

정채명은 금방 샤워를 마치고 타월로 아랫도리만 가린 채 나왔다. 나이를 착각 할 정도로 건장하고 탄력 있는 피부가 불빛에 윤기가 났다. 가슴에 무성하게 난 검은 털은 배꼽으로 타고 밑으로 흘러 내려갔다. 그러나 희끗한 색깔이 섞여 거기서는 그의 나이를 감추지 못했다.

그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재빨리 수진의 가슴에 손을 집어넣어 그녀의 유방을 움켜쥐어 보았다.
“아야야⋯” 
수진이 엄살을 떨었다. 여자는 어느새 베이지 색 잠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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