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종각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아니 저게 뭐야!”

김인세가 갑자기 진복성의 어깨를 치면서 소리를 질렀다. 깜짝 놀란 진복성과 두 사나이가 두리번거렸다. 그 틈을 타서 김인세는 종각 뒤 골목으로 힘껏 뛰었다. 잠시 어리둥절하던 세 감시원은 김인세를 뒤따라 뛰었다.
김인세는 종각을 지나 골목을 한 바퀴 돈 뒤에 광교를 거쳐 다시 종각으로 돌아왔다.
장미영에게 도망 갈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세 감시원이 필사적으로 김인세를 따라 왔다.

김인세는 재빨리 종각 계단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거미처럼 종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인세씨?”
거기에는 먼저 와 있던 장미영이 나직하게 불렀다. 김인세는 너무나 반가워 미영을 끌어안고 엎드리며 숨을 죽였다.
“분명이 여기로 왔는데.”

밖에서 진복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종루에 까지 올라오고도 김인세와 장미영을 발견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오래 동안 숨을 죽이고 껴안고 있었다. 설마 종속에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미영아, 사랑해.”

김인세가 미영의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 그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을 듣기는 처음이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섞은 일은 여러 번 있었지만 쑥스러워서 한 번도 한일이 없는 말이다.
“쉿!”
장미영은 자기의 입술로 김인세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들은 그 특별하고 안전한 국보 2호의 보금자리에서 근 한 시간을 숨어 있었다. 진복성 등이 그들을 포기하고 딴 곳으로 간 것 같았다.

“빨리 나가요. 은행에 가서 알려야 해요.”
김인세가 장미영의 손을 잡고 종 밑을 기어 나오며 재촉했다.
그들이 종루에서 조심스럽게 내려섰을 때 거리는 여전히 분주했다. 
진복성 일행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광교 네거리로 나갔다. 은행 정문으로 뛰어갔다. 그러나 은행은 벌써 경광등이 번적이는 경찰차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무슨 일 났습니까?”

김인세가 정복을 입고 있는 정문 앞의 경찰관을 보고 물었다.
“은행 금고를 털려던 얼간이 도둑을 잡았답니다.”
참고인으로 수사 기관에 불려간 김인세는 진술을 마치고 궁금하던 것을 물어 보았다.

“그들이 왜 잡혔습니까? 준비가 장난이 아니던데.”
수사관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은행이 셜록 홈즈 시대처럼 그렇게 어수룩한 줄 알았던 모양이죠. 그들이 생각하는 경보 장치 외에도 적외선 경보장치 같은 최첨단의 감지 장치가 더 있지요. 그보다 그들이 더 어리석었던 것은 금고에 돈이 얼마 없었다는 것입니다. 시중 은행의 현금은 영업시간이 끝나면 대체로 한국은행으로 보내진다는 것을 잘 몰랐던 것입니다. 정작 은행에 남는 현금은...”

김인세와 장미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경찰서를 나왔다. 광교로 다시 온 그들은 은행 앞에 있는 광통교 모형을 착잡한 감정으로 바라보았다.
‘이성계의 보물은 어디에 있을까?’

두 사람은 다시 종각 앞으로 걸어갔다.
“우리 보금자리에 가서 사랑을 확인해 볼까?”
김인세의 말에 장미영은 볼에 장미빛 홍조가 떴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 광통교는 헐리고 청계천은 하늘이 활짝 열린 아름다운 개천으로 변했다. 그러나 정릉의 묘석들은 아직 그곳에 흩어진 채 남아있다.
 

[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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