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밤 우리는 야근을 하다가 그만 철없는 장난을 시작했거든요. 사무실 소파 시피서 두 사람이 다 옷을 벗다시피하고 엉켜 있었는데....” 
“엉켜? 어떻게?” 
준철의 목소리가 다시 거칠어졌다.
“호호호...상상에 맡겨요.” 
갑자기 봉주가 큰소리로 웃었다. 여자의 웃음은 두 사람의 어색한 사이를 금방 바꾸어 놓았다.

“재미 좋았겠군. 처음부터 올가즘도 느꼈어? 그래서...” 
준철의 목소리도 약간 장난기를 띠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우리 부대장이 부관을 데리고 들이닥쳤지 뭡니까.” 
“ㅋㅋㅋ...꼴 좋았겠는데...” 
준철이 고소하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지?” 

“그 남자는 어딘 가로 사라졌어요. 다시는 그 사람 소식을 듣지 못했어요. 그리고 나는 거미 부대의 다른 파견대로 옮겨가게 되었어요. 그 곳을 그만두고 싶어도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어요. 벌써 4년 반이나 지난 일이군요.” 
“아직도 그 남자를 사랑해?” 
준철이 봉주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거미 부대는 같은 육군 소속의 정보 부대이면서 다른 부대와는 전혀 교류가 없어요. 마치 정부의 다른 정보기관을 적군인 것처럼 다루어요.” 
“그러니까 오직 장관 한사람을 위해서 일하는 기관이란 말이군.” 
곽 경감은 한강 유람선 회담에 대한 보고서를 낸 뒤에는 곧장 산정호수에서 발견되었던 여자들의 유류품과 남자들의 지문 등에 대한 수사에 들어갔다.

여자들의 옷은 거의가 그곳 종업원들의 옷이었다. 두어 가지만 국무위원 부인들의 것이었다. 범행을 저지른 납치범 일행들의 옷으로 보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곽 경감이 성과 없는 수사를 끝내고 오랜만에 잠실에 있는 25평짜리 초라한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였다.
“손님이 와 계신데요.”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는 아내가 건넌방을 가리켰다.
“경감님 접니다.” 

곽 경감이 들어오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방문이 열리며 사람이 나왔다.
“아니 당신은.... 조준철씨 아니요?” 
“예. 오랜만입니다. 그 동안 소식 전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두 사람은 좁은 방에 마주 앉았다.

“그래 밤중에 여기까지 왔을 때는 보통 일이 아닐 것이고...” 
조준철은 나봉주에게서 들은 거미부대의 이야기와 고문직 교장에게서 들은 서종서 차관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그러니까 나를 납치해서 페닌슐라 호텔로 데려 갔던 사람들은 육군 정보부대인 거미 부대란 말이군.” 

곽 경감은 어처구니가 없어 한참동안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있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찾아갔던 길음동의 그 이상한 사무실도 거미부대와 관계가 있는 곳으로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그 전화번호를 적어놓은 조은하씨도 그들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 아닐까?” 
“그때 별다리 학교서 누나 소지품에서 발견된 999국에 4884 000이란 전화 번호
말이죠?“ 
                    
<39> 대낮부터 저런 망칙한 짓을...

“그뿐 아니라 서종서 차관과도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이지...거미부대와 내무부와 초등학학교 여선생님이라...” 

곽 경감은 담배를 꺼내 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합동 수사본부에서는 새로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한강 유람선에서 건져온 각종 자료들이 민독추의 정체를 밝히는데 크게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유람선 접촉은 그들의 요구대로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감시가 없는 것처럼 되었지만 실은 배 전체에 각종 감시 장치를 해 두었던 것이다.
거기서 가져온 중요 자료란, 백 장군이라는 사람과 그의 수행원인 여자의 비디오 촬영 테이프와 그들의 목소리 녹음, 지문 등 선상 자료와 그들이 사라진 행로에 관한 자료 등이었다.

한동안 그 일에서 손을 떼었던 곽 경감은 다시 유람선 사건에 차출되었다.
곽 경감은 여러 각도에서 찍은 백장군의 얼굴 장면을 분석해서 누군가를 알아내는 파트의 일을 맡았다.

“이 사람은 분명히 군대에 오랫동안 있던 사람일 것입니다.” 
백 장군의 비디오 테이프를 한참동안 관찰해본 곽 경감이 제4부장인 신동훈 대령을 보고 말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합니까?” 
신 대령은 인화된 백장군의 사진들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짧게 깎은 머리라든지 얼굴 표정 관리가 엄격한 조직에서 울어나 온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뿐 아니라 이 사람이 몸을 움직일 때의 모양을 자세히 보세요. 군대의 제식 훈련을 받은 사람의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절도 있게 움직이는 모양이라든지 돌아설 때의 딱딱한 몸 움직임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곽 경감의 말이 맞는 것 같아 신 대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군인들 중에서 이 사람의 얼굴을 찾아내는 게 빠르겠군.”
“그건 제3부의 소관 아닙니까?” 

곽 경감의 말대로 군부에 관한 수사는 합동 수사본부 제3부에서 맡고 있었다.
“3부와 우리부가 합쳐서 이 작업을 하는 것이 편리할 것 같은데.... 내가 상부의 허락을 받아 올 테니 내일부터 시작합시다.” 
그렇게 해서 3,4부의 합동 수사가 시작되었다.

우선 백 장군이라는 자의 인물 사진을 여러 각도에서 만든 뒤 각 정보기관의 예하 부대에 보내 그 사람의 신원을 알아내는 일부터 시작했다. 또한 여자의 사진도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 군 정보 및 수사기관뿐 아니라 다른 정보기관이나 경찰의 정보 파트에도 보내 신원을 알아내는 작업을 했다.

곽 경감은 요원 몇 사람을 데리고 유람선에서 채취한 지문의 주인을 찾는 작업을 하는 한편, 백 장군과 빨간 모자의 여인이 사라진 곳을 추적하는 수사도 함께 진행했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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