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누가 먼저 제비에 뽑혀 두 번째 희생자가 되느냐 하는데 신경이 곤두 서 있는 것 같았다.
“누가 먼저 죽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죽게 되면 우리는 모두 죽는 것이고 살게 되면 모두 살게 되는 것이지요.” 

총리 부인 문 숙 여사가 무거운 침묵을 깨고 한마디 했다.
여자들이 모래알을 씹듯이 입맛 가신 점심을 먹고 다시 거실격인 강당으로 돌아 왔을 때였다.
“자, 모두들 주목해요. 대체로 괜찮게 편지들을 썼더군요. 한데 몇 사람은 도대체 이 취지를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요.” 

그는 편지 뭉텅이를 오른손에 들고 흔들면서 말했다.
“제법 쓴 것 한 두통만 여기서 공개를 하고 보내겠어요.” 
여성부장이 공개를 한다는 바람에 모두가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불안으로 입술이 마르고 손이 떨리는 여자들도 있었다.
"팽희자씨!" 
"예?" 
모두가 팽희자씨를 돌아보았다. 여자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초등학교 학생처럼 오른팔을 번쩍 들었다.

“이리 나와 봐요. 아주 모범적으로 썼어요. 나와서 좀 읽어봐요.” 
팽희자는 거의 사색이 되어 부들부들 떨면서 앞으로 나갔다.
“자, 이것 좀 읽어봐요.” 
여성부장이 팽희자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사색이 되어 부들부들 떨던 팽희자가 편지를 받아 들었다.
“빨리 읽어욧!” 

한참 머뭇거리든 팽희자는 각오한 듯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 보고 싶은 당신에게 
첫마디를 읽자 장내는 숙연해졌다. 모두가 절실하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여보! 우리가 결혼 한 이후 이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있기는 처음이군요. 지금처럼 당신이 그리운 일은 없었답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헤어져 있어야만 하는 겁니까? 당신 곁에 있을 때는 당신이란 존재를 별로 느끼지 못했지만 떨어져 있으니까 당신이 나에게 얼마나 커다란 존재, 아니 나의 전부였던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여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불안해서 죽겠어요. 나라도 좋고 백성도 좋아요. 하지만 우리가 만나지 못하는 세상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우리가 다시 만나서 살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나은 선택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여보! 우리는 유관순이나 논개 같은 절세의 애국자이기보다는 평범한 아내와 남편이 되는 길을 찾아요.
여보! 

이 사람들이 요구하는 대로 다 해주어요. 내가 당신을 잃기 싫듯이 당신도 나를 잃기 싫은 것을 나는 다 알아요. 정말 불안해서 죽겠어요. 두 번째 희생자가 나오기 전에 모든 것을 포기하는 용기를 가지세요. 두 번째, 세 번째 희생자 속에 내가 들어가지 말란 법이 없잖아요. 
여보 정말 보고 싶어요.
          -당신의 희자로부터- 

팽희자가 떨리는 음성으로 편지를 읽는 동안 숙연해진 실내에서는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자기 처지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여자들이 많았다.
팽희자의 눈에서는 두 줄기 눈물이 줄줄 흘러 내렸으나 그녀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팽희자씨 수고했어요. 들어가세요.” 
여성 부장의 목소리가 약간 부드러워졌다.
“다음. 선영실씨 나와요.” 

선영실이 기다렸다는 듯이 성큼 성큼 걸어 나왔다. 늘씬한 몸매에 걷는 모습도 마치 패션 모델의 걸음걸이 같았다. 육감적인 히프를 좌우로 흔드는 모습은 남자들이 보았다면 좋아할 걸음걸이였다. 호스티스 출신이라 그렇게 세련되게 걸을 수 있을 것이라고 다른 여자들은 생각했다.

“읽어봐요.” 
여성부장이 편지를 넘겨주었다.
- 어흠, 어흠. 

선영실은 마치 독창이라도 하러 나온 소녀처럼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앞에 있는 의자에 앉은 뒤 맵시 있게 무릎을 척 포갰다. 늘씬한 각선미가 잘 드러났다.
“그까짓 몇 줄 된다고 뜸을 드리고 있어요? 빨리 읽고 들어가요.” 
여성부장이 독촉을 했다.

- 존경하는 육군 장관 예비역 육군중장 김교중씨에게.... 
“후후후...”
여기 저기서 갑자기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히들해요.” 
여성부장이 마치 국민하교 학생을 다루듯이 말했다. 선영실이 다시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 빨리 이 사람들 말 들어주고 저를 구해주세요. 저는 죽기 싫어요. 그까짓 장관자리 그만 두어요. 육군 중장 자리도 그만 두었는데 그까짓 장관 자리 그만두는 게 제 목숨보다 아까워요? 나중에 다시 더 좋은 자리 할 수도 있잖아요? 나 좀 살려 주세요.                             -선영실- 

선영실의 호소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나름대로의 솔직함이 짧은 글 속에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선영실씨 들어가서 제 자리에 앉아요.” 
선영실이 다시 히프를 흔들면서 걸어 들어왔다. 조금도 부끄럽다거나 다소곳한 태도는 볼 수 없었다.

“이 편지에 대해서 모두 어떻게 생각해요?” 
그러나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모두 할 말이야 있겠지만 표현하기가 싫었던 것이다.
“좋아요. 그럼 다음에 황순덕씨 좀 나와요.” 
“예? 저 말입니까?” 

제일 뒷자리에 앉아있던 상공장관 부인 황순덕씨가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커다란 얼굴에 눈도 커다란 그녀의 놀란 모습은 금방 다른 사람들 눈에 띄었다.
“여기 황순덕씨가 둘 있어요?” 

여성 부장이 핀잔을 주었다. 황순덕씨가 그 커다란 몸집을 뒤뚱거리면서 앞으로 나갔다. 앉아서 그녀의 걷는 모습을 보고 있는 다른 여자들은 저렇게 살만 뒤룩뒤룩 찐 여자가 어떻게 남편 외의 남자들과 정사를 했는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우에 올라탄 남자들은 고급 승용차 뒷좌석에 탄 것 같은 푹신한 여체를 즐겼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황순덕이 나가서 편지를 받아들고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무릎을 척 포개었다. 그러나  팽팽하게 살찐 장딴지는 선영실의 각선미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자, 읽어욧.” 

여성부장이 편지를 황순덕씨 앞에 집어던지면서 말했다. 몹시 못마땅해 하는 행동으로 보아 엉뚱한 내용이 있는 것 같았다. 황순덕씨는 일어나서 바닥에 떨어진 편지를 주워 들고는 다시 의자에 앉아 또 고집스럽게 억지로 다리를 포갰다.
“빨리 안 읽고 뭐해욧!”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