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 경감은 그가 여기서도 장군으로 불리운다는 것을 얼른 인정했다.
“그 양반 좀 찾아 주어요. 우리도 몇 달째 소식을 몰라 큰일 났어요.” 

노인은 오히려 곽 경감을 잘 만났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노인은 곽 경감에게 거실로 올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곽 경감은 거실로 올라가 상자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노인에게 담배 한대를 권했다.

노인은 담배를 보자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을 꺼냈다.
“댁은 뉘시오? 우리 백장군님의 친척이시우?” 
“친굽니다. 학교 동창인데 근 십년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여기 산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나가던 길에 들렸습니다. 지금 여기 안계신가요?” 

“우리 장군님의 친구 분이라니 참 반갑구려. 이 세상에 우리 장군님 같은 분은 없을 겁니다.” 
노인은 백대령 칭찬을 입이 마르도록 했다. 칭찬이라기보다는 그를 신처럼 존경하고 있었다. 노인이나 거기 있는 어린이들에게는 그가 바로 구세주였다는 것을 한참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야 곽 경감도 알았다.

노인이 이야기한 백성규란 사람은 훌륭한 점이 많았다. 지금은 몇 달째 이곳에 오지 않아 노인과 아이들이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 이 작은 아파트는 백성규 대령이 아내, 딸과 함께 살던 집이었다.
그것도 군인 생활 20여 년 만에 겨우 마련한 아파트였다.

그런데 2년 전에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이 노인을 집에 데려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백 대령은 서울 역 구내서 자고 있는 거지 노인을 발견하고는 아버지 생각이 나서 집에 데려 왔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 그는 불우한 어린이들도 데리고 와서 열두 평 좁은 아파트에서 함께 살았다고 한다.

집이 비좁아지니까 오히려 백 대령 세 식구가 이웃에 사글세방을 얻어서 나가 살면서 그들을 돌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몇 달 동안 그 집 식구들의 소식이 끊겼다는 것이었다.
곽 경감은 이야기를 듣는 동안 백성규라는 사람이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훌륭한 일을 많이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곽 경감은 주민등록을 확인 해보았으나 그가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최종 주민등록지가 그 조그만 아파트로만 되어 있었다. 곽 경감은 백성규 대령의 친구라는 사람들을 몇 사람 만나 보았다.

“그 친구요? 좀 별종이지요. 본성은 착한 사람인데 어떻게나 고집이 세고 고지식한지.... 원리 원칙을 따지는 데는 상관이고 아랫사람이고 가 없지요. 모두 백성규하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으니까요. 그렇게 아래위가 꽉 막히지만 않았다면 군에서도 크게 될 사람이었어요.” 

그와 군대 동기라는 사람의 평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백성규. 참다운 인격자입니다. 옳다고 생각되는 일에는 목숨을 내 놓을 사람이니까요. 그는 늘 이 세상이 잘못되어 가고 있는데 대해 비분강개하고 있었습니다. 잘못된 세상은 꼭 바로잡고 말겠다고 했으니까요. 그래서 정치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특히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는 군인답지 않은 면모까지 보였으니까요.” 

군대 동기가 아닌 고교 동창 한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는 자선사업가도 성직자도 아닙니다. 그러나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자기 가진 것을 다 내놓을 사람이지요. 군인답지 않게 인정이 많고 너그러워요. 군대에서 장교노릇을 20여년씩 하면서 변변한 집 한 칸 없고 양복 한 벌 제대로 된 것이 없습니다. 그의 부인은 남편 몰래 파출부 벌이도 다 나갔으니까요. 오늘 같은 험악한 세상에 그 친구 같은 순수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자랑이 아니겠어요.” 

곽 경감은 그가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가 하는데 다소는 이해가 갔다.
그의 인간성이나 행적을 캐면 캘수록 머리가 수그러졌다.
그러나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죄 없는 사람들을 희생시킨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백성규 대령 같은 사람이 그 일을 주도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어쨌든 백성규를 추적하는 일은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노인과 어린이가 기다리고 집을 감시하는 수밖에는 별도리가 없었다.
조준철이 누나와 서종서 차관의 연관 고리를 찾는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동안 나봉주는 그 나름대로 조준철을 도울 결심을 했다. 또한 비록 극비의 합동 수사본부에 차출되어 있긴 하지만 곽 경감도 조은하 피살 사건을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한편 곽 경감이 차출되어 쫓고 있는 국무위원 부인 납치 사건은 더욱 어려운 국면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한강 유람선 회담이후 정부 쪽에는 국무위원 사이 분열의 조짐까지 보였다. 백 대령이 내놓은 국무위원 개별적인 비위, 부도덕 기록은 그들을 당황하게 했다.
“이따위 날조된 기록에 현혹 될 것 없습니다. 싹 무시해요.” 

이렇게 떠드는 총리 자신부터 켕기는 것이 많은 것 같았다. 백장군의 말대로 이 것을 내외신 기자들에게 터뜨리면 사실이건 아니건 큰 파문을 일으킬 것이 뻔했다. 아무도 모르리라고 생각한 당대 거인들의 치부가 모두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비대위가 시한을 앞두고 전전긍긍하는 동안 납치된 국무위원 사모님들도 긴박한 순간을 마지하고 있었다. 그들이 근 열흘째 수용되어 자기폭로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서울 외곽 공장지대의 한 건물. 그 곳은 수용소나 다름없었다.

“자, 다들 주목하세요. 지금부터 중대한 발표를 하겠어요.”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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