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채명 장관이 한마디했다. 장관들 중에서 총리 깜이 있다면 정채명 내무일 것이라고 자타가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새파란 젊은 사람 밑에 내무 장관을 지내게 된 그였으나 크게 불만을 가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장차관의 도덕성 문제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그였다.

“물론 전혀 문제가 없다고 단언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만.... 어쨌든 소위 민독추가 하자는 대로 따라 갈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첫 번째 내각 회의는 갑론을박만 있었을 뿐 아무 대책도 세우지 못했다.

내각회의가 그러고 있는 사이 또 하루가 가고 그들이 말하는 두 번째 희생자가 나올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어물어물 하다가 또 홀아비 장관이나 한사람 만들 것이요? 도대체 수사나 정보를 맡은 부처들은 무엇을 하는 거요?” 
배소성 외무장관이 불만을 터뜨렸다.

“누가 일부러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니잖소?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정일만 신임 육군장관이 핀잔을 주었다. 그는 정보국장 때는 물론이고 잠시 그 자리를 물러나 있는 동안에도 기가 펄펄 살아있던 인물이었다.
제2의 희생자를 예고한 민독추의 인질 수용소에서는 여전히 긴박한 분위기가 계속 되었다.

“자. 번호 없는 사람은 없지요? 그럼 지금부터 한사람이 여러분 번호 중에 한사람을 다시 뽑겠습니다. 거기에 당첨된 사람이 이 편지를 전하는 메신저가 되는 것입니다.” 
여성 부장이 인질들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국무 위원 부인들은 모두 공포에 질린 눈으로 여성 부장의 입을 응시하고 있었다.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된 사람도 있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오른 사람도 있었다. 오금을 달달 떠는 여자도 있었다. 그러나 문숙, 황순덕씨 만은 비교적 태연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문숙여사는 아예 눈을 착 내려 감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 누가 나와서 번호표를 뽑겠습니까?” 
여성 부장이 옆에 다시 마련된 추첨함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스물 한 개의 번호 중 하나를 뽑아내는 일인데, 저승으로 보내는 번호표를 뽑아 원망을 듣는 일을 자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자원자가 아무도 없나요? 그러면 내가 지명을 해도 좋습니까?” 
언제는 인질들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을 했던가? 모두가 더욱 겁에 질려 목을 움츠렸다. 거기에 지명 당하면 큰일이란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좋아요. 그럼 내가 지명을 하겠어요. 가장 공평하게 추첨을 해 줄 사람은 아무래도....” 

말을 끊고 그녀가 인질들을 쭉 훑어보다가 문숙의 얼굴에 시선을 꽂았다.
“참, 묘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여기 들어오기 전날 밤 남자와 잠자리 한 사람 있나요? 마지막 잠자리...”

요성부장의 엉뚱한 말에 모두 눈이 둥그레졌다. 남편과 마지막 정사를 나누고 온 여자ㄷ가 있다면 그 여자를 지명하겠다는 뜻인가? 장난이 좀 심하다고 느끼는 사모님도 있었다.

모두 잡혀오기 전날 밤을 되짚어 보았다.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신나게 정사를 나눈 사모님이 한사람 있었다.
그 사모님은 남편이 술 마시러 간 사이 보좌관과 응접실에서 선채로 번개치기 정사를 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보좌관의 물건이 워낙 힘이 좋아 충분이 올가즘을 느끼며 소리까지 디르지 않았던가.

여자들이 아무 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묘한 웃음을 흘리고 있던 여성 부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도 고백하기는 싫겠지요. 문숙 여사! 문숙씨는 이 중에서 가장 연장자이고 또 총리의 사모님이기도 하니까... 아니 지금은 전 총리의 사모님이지만...” 

그 순간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자기가 지명되지 않았다는 것이 목숨을 구한 것만큼 반가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문숙씨 앞으로 좀 나오실까요?” 
문숙씨가 아무 말도 않고 천천히 걸어서 앞으로 나갔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안도의 숨을 내신 것도 잠시 모두 다시 숨 막히는 공포와 긴장으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 그 상자 속에서 한 장만 뽑아요. 영광스러운 당첨자가 될 것이에요.” 
문 숙씨는 뒤로 돌아서서 추첨함에 손을 넣으려다 말고 인질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여러분 모두 참읍시다. 지금 이 자들이 하고 있는 일은 나라나 시민을 위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을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행하고 있습니다. 이 자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명분이 있으니까 어떤 짓을 해도 용서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는 있겠지만...” 

"옳아요. 우리 모두 이따위 광대놀음을 거부합시다."
문숙 여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황순덕이 그 뚱뚱한 몸집을 날렵하게 일으켜 세우며 큰 소리로 말했다.
"우리 거부합시다."

선영실도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섰다. 그러나 다른 열 일곱 명의 여자들은 고개만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저런 소리를 하다가 엉뚱한 보복이나 당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스러운 눈초리로 황순덕과 선영실을 바라보았다.
"이게 뭐하는 짓들이에요? 당신들을 장관 사모님으로 대우해 주려고 했더니, 도저히 못 참게 만드는군!"
여성 부장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어 소리를 질렀다.

‘장관 사모님으로 대우를 해준다고요? 여기가 뭐 코미디 콘서트 장 줄 압니까? 웃겨도 적당히 웃기시구려. 당신은 사람들을 납치 해다 가두어 두고 한자리 안내 놓으면 하나씩 죽이겠다는, 천하의 날강도 짓을 하는 주제에...아니 그것도 당신이 하는 짓이 아니라 당신은 그 날강도들의 하수인이잖아. 그런 주제에 무엇이 어떻다구? 사모님 대우? 하하하... 야, 너는 어제 밤에 어느 놈하고 한탕 붙어먹었나

황순덕이 코웃음까지 치면서 여성 부장에게 최대의 모욕을 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여자들 중에는 속시원하게 할 말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렇게 하다가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는 걱정으로 가슴이 조마조마해진 사람들도 있었다.?”

“부창부수라는 말이 있듯이 그 장관님들에 그 사모님들이군요.”
여성 부장은 의외로 침착하게 말을 계속했다. 그렇게 모욕을 당하면 당장 펄펄 뛸 것 같았으나 그렇지 않았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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