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이 편지를 가지고 서울 시내로 들어 갈 사람을 뽑겠어요. 모두 서로 가려고 할 테니까 제비를 뽑아서 한 사람이 가도록 하겠어요.” 
여성부장의 말은 여자들에게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편지를 전달하는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는데 왜 하필이면 인질 한 사람을 시켜서 보낸단 말인가?

여자들은 여성 부장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았다. 먼젓번에 뽑혀간 해군 장관 부인 차영순씨가 영 돌아오지 못하는 희생자가 되었다는 것을 자꾸 머리에 떠 올렸다. 모두가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왜 표정들이 그래요? 편지 가지고 서울 간다는데...” 
여성부장이 인질들의 속마음을 읽은 것 같았다. 그러나 여성부장은 사모님들의 속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하게 일을 진행했다.
“자 지금부터 제비뽑기를 해서 행운의 한 사람을 뽑겠어요. 여러분들 입찰계라는 것 자주 해 보았지요?” 
“그 것을 왜 우리가 전달해야 합니까?” 

문숙 여사가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읽었는지 일어서서 말했다. 문숙 여사는 톤을 낮추어 조용히 이야기했으나 강력한 항의의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여러 분이 우리를 위해 무엇인가 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기에 와 있지만 중요한 역사적인 일을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여성부장의 말이 도대체 이치에 닿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나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그 편지 내가 가지고 갈 테니 낙찰곈지 뭔지 하는 제비뽑기는 그만 두도록 해요.” 
뜻밖에도 황순덕이 벌떡 일어서서 이야기했다. 말은 조용히 했으나 입술과 팔다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 편지의 메신저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두 짐작하고 있었다. 
두 번째희생자! 
목숨을 내 놓는 일을 누가 자원하겠는가? 
그러나 황순덕은 그것을 자원하고 나섰다. 조금 전에 읽었던 그녀의 편지에서 그녀의 존재를 다시 느꼈던 여자들은 모두 충격으로 입을 벌린 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황순덕씨는 아까도 이상한 편지를 쓰는 위선자였는데... 또 이상한 제안을 하는군요. 이 편지 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 편지 가지고 나가서 남편 몰래 만나든 그 운전기사 품이 그리워서 그러는 거죠?” 
여성부장이 모욕감을 주려는 듯 한껏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 그러나 황순덕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편지는 내가 가지고 가겠소. 나는 일행 중에 가장 나이가 많고, 바깥양반들의 지위를 보더라도 내가 할일 같으니 그렇게 해주시지요.” 
문숙여사가 말했다. 그러나 여성부장은 두 사람의 말을 묵살하고 다시 자기 고집대로 일을 진행했다.

“자, 지금부터 제비를 뽑겠습니다. 그 상자 가지고 와요.” 
어느새 들어왔는지 곁에 와있는 청년 두 명을 향해 여성 부장이 명령했다.
곧 네모난 조그만 상자를 청년이 들고 들어왔다.
“자, 이 상자 속에서 접혀 있는 종이쪽지 한 장씩을 각자가 꺼내는 겁니다. 종이쪽지에는 넘버가 적혀 있습니다. 그 넘버를 잘 외어 두십시오. 그럼 누가 먼저 나오겠어요?” 

실내가 긴장으로 팽팽해졌다. 문숙 여사가 먼저 나갔다. 그녀는 상자에 손을 넣어 접힌 종이 한 장을 뽑아들고 펴 보았다.
“4번이군요.” 

문숙 여사가 말하자 청년이 그 것을 확인한 뒤 자기가 가진 노트에 적었다.
“그 것을 가지고 들어가 있어요. 다음...” 
그 다음에 배소성 외무장관 부인 김순주가 나왔다. 상자 속에 집어넣는 희고 가느다란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는 것을 멀리 있는 사람들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19번이에요.” 

마치 숫자가 멀리 있을수록 행운이나 되는 것처럼 다소 안도의 모습으로 말했다.
다음에는 황순덕이 나왔다. 그녀의 넓적하고 큼직한 얼굴은 아무 표정도 나타내지 않았다.

“5번.” 
황순덕은 종이쪽지를 청년 앞에 휙 던지고 들어가 버렸다. 마음대로 하라는 투였다.
그 다음에는 아무도 제비를 뽑으러 나오지 않았다.
“다음...” 

여성 부장이 독촉을 했다. 그러나 모두 고개만 푹 숙인 채 아무 대답이 없었다.
“할 수 없군요. 그럼 내가 한사람씩 호명을 하겠어요.” 
일행을 주욱 돌아본 뒤 호명을 했다.
“선영실씨!” 
“옛? 저, 저요?” 

김교중 육군 장관 부인이 놀라서 큰 소리로 대답했다. 떨리는 다리로 일어서서 나왔다.
“다음 김휘수씨. 다음 팽희자씨, 다음 조민숙씨... ”
스물 한명 모두가 나와서 숫자 한 장씩을 뽑았다.

“자 그럼 지금부터 스물 한 명중 한사람만을 다시 추첨하겠습니다.” 
여성 부장의 말이 떨어지자 실내는 공포의 도가니로 변했다.
국무위원 사모님들이 갇혀서 온갖 수모 속에 생명을 내건 제비뽑기가 진행되는 동안 정부 쪽에서는 갑론을박이 그치지 않았다.

우선 한강 유람선에서 백장군이라는 자가 건네준 자료가 아주 고약한 것이었다. 현직 대통령을 비롯해 정부의 차관급 이상 요직 인물들의 신상에 관한 내용이 주된 자료였다.

장차관등 현직 인물뿐 아니라 과거 이 정권과 연관된 인물이나 여당의 영향력 있는 정치인들까지 망라되어 있었다. 주로 그들의 약점이 지적되어 있었는데, 그 중에는 대통령의 여자  관계까지 자세하게 언급되어 그 것이 공개 되는 날에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것 같았다.

대통령의 스캔들은 주로 아무개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여자들과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었다. 현직의 대통령에 대해 소위 민독추가 공격을 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대통령이 변장을하고 민간 아파트에 나가 유명한 여배우와 섹스를 하는 장면까지 있었다. 톱스타급 영화배우 두명을 한 침대위에 올려놓고 차마 말 못한 야한 짓을 하는 모습이 적나라    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그 외 각부 장차관들에 관한 것도 여자관계를 비롯해 재산문제, 부당한 업무처리, 친인척이나, 재벌과의 부도덕한 유착 등이 열거되어 있었다.
“아니 이런 엉터리 정보가 도대체 어디서 흘러 나갔단 말입니까?”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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