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 부부가 아이 문제로 이혼한다? 내 친구들은 어울리지 않는다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나 유학파 가운데 더 보수적인 사람이 많다는 건 아는 사람만 아는 사실이었다. 

이혼을 하고 두 달쯤 지났을 때 이상하게 속이 느끼해 내과를 찾아갔다. 그랬더니 어이없게도 임신이라는 것이었다. 벌써 3개월이 지났다고 했다. 생리불순이 심했던 나로서는, 현대 의학의 힘을 빌려 그렇게도 임신하고자 노력했으나 실패했던 나로서는 기가 찬 노릇이었다. 

나도 한 생명을 잉태했다는 자부심은 잠깐이었다. 이혼한 처지에 아이를 가졌으니 이를 어쩌란 말인가? 아이 가졌으니 도로 합쳐? 그러나 결혼 생활에서 남편에게 받은 상처가 너무 심해 재결합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를 지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빠도 없는 아이를 낳아 키운다는 건 천형이나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이 마흔이 넘은 나로서는 인생에서 단 한 번밖에 없을 생명 잉태의 기회를 소멸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이런 혼란 속에서 여행을 떠났다가 만난 사람이 그였다. 그는 내 사연을 듣더니, 거룩한 생명을 앞에 두고 떼느냐 마느냐 하고 고민하는 것 자체가 삶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며 준엄하게 질책했다. 아이 아버지가 필요하면 자기가 되어 주겠다, 친자식으로 받아들여 키우겠다며 절대로 없애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내 아이는 그 덕분에 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그의 말이 백 번 맞았다. 이 귀한 생명을 지우느니 마느니 했다니, 생각만 해도 내 자신에 대해 소름이 끼쳤다. 

그는 기꺼이 아이를 자신의 호적에 입적시켰다. 아직 결혼을 한 것은 아니므로 호적에 둘의 혼인 관계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가족관계등록부에 내 아이가 그의 친자로 올랐고, 나는 생모로 적혔다. 

나는 그런 그가 고마웠다. 가족관계등록부를 떼어 보는 순간, 이 남자를 영원히 사랑할 것 같은 예감, 아니 영원히 사랑하리라는 맹세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기를 낳은 이후, 본격적으로 동거 생활에 들어가면서 아이를 친아들처럼 귀여워하며 키우는 그의 모습을 보고 진정으로 마음속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이후 우리는 자주 만났지요. 그는 여관이나 호텔처럼 여러 사람이 거쳐 가는 곳은 불결해서 싫다며 집에서 만나자고 했어요. 저는 정말 행복했어요. 사랑이 이런 거구나 하고 처음으로 알게 됐어요. 고교생과 했던 풋내기 사랑과는 다른, 세련된 사랑을 우리는 나누었어요.”

여학생은 말을 하면서 안방을 가리켰다. 내 침대가 있는 방, 그와 내가 함께 자던 그 방이었다. 
나는 눈앞이 아뜩해지면서 여학생의 얼굴이 가물가물하게 느껴졌다. 나와 사랑을 나누었던 그곳에 저애를 끌여 들였다고? 이럴 수가, 이럴 수가...
“그때가 언제예요?”

내 물음에, 여학생은 손가락을 펴며 계산을 해보았다. 
“3-4개월쯤 전이에요. 2학기 시작하고 얼마 안돼서이니까요.”
그렇다면 내가 아이를 낳으러 미국에 있는 친정에 갔을 때였다. 노산이니만치 어머니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어요. 아침에 일어나니까 오늘은 이모가 빨래도 해주고 김치도 담가 주려고 집에 다니러 오실 거라면서 서둘러 청소를 하더군요. 그리고는 여자라고는 모르는 자기가 여자를 데리고 와서 잔 표시가 나면 충격 받으실 거라면서 이불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주우라고 했어요.”

흥,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고 했군. 교활해, 교활해.  
여학생은 긴 생머리에 포도주 빛깔의 염색을 한 상태였다. 그러니 짧은 머리에 퍼머를 하고 벌써 희끗희끗해진 새치를 가리려고 흑갈색 염색을 한 나와 확실히 구별이 될 것이었다. 

“저는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주웠지요. 결혼도 하기 전부터 남자 집에 와서 잔 걸 아시면 이모님께서 좋지 않게 여기실까봐서요. 그것보다도 지훈 씨가 이제껏 쌓아온 이미지를 나로 인해 깨트리고 싶진 않았어요.”

[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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