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인공의 이름이 나와 가운데 글자만 달랐다. 스토리는 바로 내 이야기였다. 나는 마치 내 자신의 나체 사진을 잡지에서 보는 듯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가 내 이야기를 썼구나. 이래도 되나? 나한테 아무런 양해도 구하지 않고 이래도 되는 건가?  

내 이야기를, 가슴 아픈 얘기를 만천하에 드러내고 싶진 않았다. 굳이 까발리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이야기도, 감동적인 사연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나를 모델로 신작을 썼다는 게 당황스러웠지만, 질퍽거린 내 인생이 그의 손을 거쳐 괜찮은 작품으로 승화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일말 들기도 했다. 

나는 단숨에 작품을 읽어 내려갔다. 대학을 수석 졸업해 유학 가서 세계적 화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이야기, 거기서 사진 작가인 전남편을 만나 결혼한 후 이혼한 내 과거가 적나라하게 들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다시 현시점으로 돌아와 그와 스카이라운지에서 만나는 장면이 펼쳐졌다. 

그는 소설 속의 남자 주인공 이름을 자신의 실명 그대로 썼다.  

- 누군가의 시선이 계속 뒤에서 느껴졌다. 홀로 일출을 보며 기를 흠뻑 들이마시고 있는 내가 신비스럽기라도 한 듯. 그러더니 얼마 후, 시선의 주인공이 내게 다가왔다. 

또각, 또각, 또각. 
하이힐 발자국 소리. 정갈한 소리였다. 
“저, 송지훈 선생님 아니신가요?” -

그는 실제 있었던 일과 반대로 당시의 장면을 묘사했다. 그가 내게 말을 걸은 게 아니라 내가 그에게 접근한 것으로... 
이 부분부터는 픽션이 꽤 많이 가미되었다. 남자 주인공은 최대한 미화되었고, 여자주인공은 최대로 슬프고 가련해 보였다. 
그렇게 하니 소설적으로 완성도가 더 높아 보이긴 했다. 

용서하자. 작품을 위해서야 이 정도의 가필은 있을 만하지 않겠어? 실화라고는 하지만 다큐멘터리는 아니니 소설적 요소는 어차피 있어야 하겠지.
나는 이렇게 마음을 달래며 계속 읽어 나갔다. 그러나 뒷부분에 가서는 손이 부들부들 떨려 글씨가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고 말았다. 이건 가필이 아니라 곡필이기 때문이었다. 

- 전처가 임신한 사실을 안 진성희의 남편은 재결합을 원했다. 그러나 진성희는 결코 재결합을 원치 않았다. 
진성희는 재치를 발휘했다. 이 아이는 당신의 아기가 아니다, 나는 이혼 전에 이미 다른 남자를 사귀고 있었다. 바로 그 남자의 아기다 하고 선언한 것이었다. 
진성희는 송지훈에게 찾아와 도움을 요청했다. 자기의 남자가 되어 달라는 것이었다. 전남편이 자기 말을 믿지 않으니 그를 찾아가 아기 아빠라고 고백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우리는 각자 독특한 예술 세계를 가진 담백한 도반 관계였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의 남자가 되어 달라니... 

[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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