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문단과 독자들에게 청정한 승려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강릉에서 처음 그와 만났을 때 나는 그의 존재를 모르는 척했지만, 실은 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처음 문단에 데뷔하면서 받은 문학상 수상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여성지마다 그의 범상치 않은 삶이 소개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중학교 때 고아가 되어 고학으로 공부해 명문대를 갔고, 부모의 죽음과 여동생의 죽음을 목격한 충격이 가시지 않아 생사 해탈을 하려고 입산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첫사랑이었던 여학생이 자신의 입산 사실에 충격을 받아 자살하자, 그는 자신이 살생한 거나 마찬가지니 승려가 될 자격이 없다고 하여 정식 승려가 되진 않았다고 했다. 그는 이후로 깊은 산속에서 화전민 같은 생활을 하면서 죽은 여학생을 위한 시를 썼고, 그 시를 엮어 낸 시집이 문학상을 받게 된 것이었다. 

한 남자가 자신 때문에 죽은 여자를 기리며 참회하는 마음으로 산간 생활을 하고 시를 써서 만인을 울린 사연은 당시 여러 사람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특히 소녀적 감성이 많은 여성들 가운데서 인기가 높았다. 이후로도 그는 산 생활을 계속하면서 시를 발표해 왔다. 주로 논밭을 갈고 곡식과 채소와 나무를 가꾸며 산과 구름과 바람에 대해 느끼는 바를 묘사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만나면 산을 만나는 것 같다고 하였다. 그가 서울에 나타나면 푸르른 산이 성큼 내려와 앉은 느낌이 든다고 표현한 기자도 있었다. 적어도 서울 사람들에게 그는 무공해 청정인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름 대신 그를 ‘산’이라고 불렀다. 

나도 그런 그의 이미지를 다치지 않으려고 둘이 동거하는 사실을 철저히 숨겨 왔다. 자칫 실수라도 할까봐 평소에도 그로 하여금 나를 이모라고 부르게 했고, 나는 그를 ‘산’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아이까지 두고 있다는 사실은 이번에 쓰고 있는 새 작품을 발표하면서 출판 기념회 겸 결혼식을 올리고, 그 자리에서 알리기로 했다. 
자신보다 열 살이나 많은 이혼녀랑 결혼한다는 게 부끄럽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데 나이 차이가 무슨 문제냐며 그런 걱정을 하는 나를 오히려 속되게 볼 정도였다. 

우리 사이에 아기까지 있다는 사실을 알면 세상 사람들이 놀랄 텐데 그래도 괜찮으냐고 물으니까 그는 더욱 펄쩍 뛰었다. 세상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보더라도 난 당신과 ‘우리’ 아기를 위해 모든 걸 희생할 각오가 돼 있다는 것이었다. 

아, 이렇게 전적으로 날 수용해 주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자신의 명예도 인기도 다 버릴 각오까지 하면서 나와 아기를 지키려는 사람을 위해 내가 뭔들 못하랴 싶었다. 

그런 그였다. 사랑스럽고 믿음직스러운 그였다. 
“이상하게 그 이후로 지훈 씨는 나를 멀리 대했어요. 내가 연락해도 새 작품 쓰느라고 바쁘다며 만나주질 않았어요.”

여학생의 말을 듣고 벌렁거리던 내 가슴이 진정되었다. 
그러면 그렇지. 그럴 거야. 그 사람에게 잠시 뭔가 씌워서 그랬을 거야. 여동생 귀신이 씌운 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나와 아기를 위해 모든 걸 감수하겠다던 그가 어린 여학생과 그런 유치한 육체 놀음을 했겠어? 
내가 없는 동안 그 공백이 너무도 커서 그랬을 거야. 그 허전함을 달래지 못해 이 아이를 대용물로 삼았겠지.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여학생을 다시 바라보았다. 세상 물정 모르는 것 같은 순진한 얼굴이었다. 아이를 낳은 후 살이 투덕투덕 찐 나와 달리 여학생은 앙상하리만큼 마른 체구였다. 손가락도 길쭘길쭘 했고, 목선은 처량하리만큼 길었다. 

“그런데 제 몸에 이상이 생겼어요. 생리가 없는 거예요. 임신이라고 직감했죠. 저는 남자랑 자기만 하면 금세 임신이 되거든요. 고등학교 때도 사귀었던 남학생이랑 딱 한 번 잤는데 임신을 해서 부모님이랑 선생님 몰래 처리하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요.”  
뭐라? 임신? 

갑자기 열등감이 확 밀려 왔다. 아이가 들어앉을 궁은커녕[子宮], 정자가 헤엄칠 통로도 없을 것 같이 빼빼 마른 계집애가 임신은 잘 된다고?  
“그래서 저는 더욱 지훈 씨를 만나야 했어요. 새 작품 마무리 작업에 여념이 없다고 했지만 임신 문제는 빨리 해결해야 하잖아요.”

[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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