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성희의 하소연을 들으며 송지훈은 옛스님의 이야기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절 아랫 동네 과부가 불륜을 맺어 아기를 낳았다. 동네 사람들이 손가락질하자 과부는 윗절 스님이 탁발하러 왔다가 자신을 겁탈해 아기를 낳게 되었다고 소문을 내고는 핏덩이 아기를 절에 갖다 놓았다.

스님은 이렇다 저렇다 부인하지 않고 아기를 자신의 아기로 키웠다. 동네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돌팔매질을 심하게 당하면서도... 
‘인륜도덕을 심히 따지던 옛 시절에 사음을 금기시하는 스님의 신분에서도 받아들였는데, 내가 곤경에 처한 여자를 돕지 않는대서야...’ 
송지훈은 이렇게 생각했다. - 

다음 글을 읽으면서 나는 숨이 턱턱 막혔다. 

- 송지훈은 진성희와 아기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진성희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그렇게 담백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주 만나다 보니 정이 들고, 전남편의 아이를 임신한 사실도 모르고 이혼해 마음고생이 심한 모습을 보고 연민도 쌓였다. 

송지훈은 산에서 풀을 가꾸듯, 나무를 가꾸듯 모자를 받아들여 가꾸기로 했다. 그도 인간인지라 남의 아이를 친자로 입적하기가 께름칙했다. 그러나 기왕 입양하는 것, 친자로 올리기로 생각하고...
 
이때까지 한 거짓말은 모두 용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입양이라는 말에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나쁜 자식. 결국 진심은 그것이었구나. 이 글을 쓰기 위해 나를 만났구나. 소설을 실화로 만들기 위해 나와 아기를 이용한 거야.  

그는 실화라고 하면서 왜곡해 놓은 걸 들킬까봐 내게 미리 보여 주지 않은 게 분명했다. 결혼식 겸 출판 기념회까지 비밀로 했다가 그 날의 이벤트로 내가 소설 속의 내용을 기정사실로 간접 입증한 뒤에야 읽히려고 한 게 틀림없었다. 그야말로 나를 빼도박도 못하는 처지에 몰아넣으려 했던 것이다. 

하! 두 중년 남녀의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 
책 뒷면의 광고 문구를 보고 나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어쨌든 책이 나오기 전에, 결혼식을 하기 전에 교정지를 읽게 되었다는 건 나로서는 커다란 행운이었다. 하늘의 도우심이었다. 

나는 밤새도록 어떻게 복수전을 펼칠까 연구했다. 그리고 다음날, 그 여학생을 불러냈다. 일부러 아기를 데리고 약속 장소에 나갔다. 
“이 소설, 읽어 봤어요?”
난 그 여학생이 가져온 교정지를 도로 건네주었다. 여학생은 고개를 가로로 흔들었다. 

“실화 소설이라지만 반쯤은 실화고, 반은 허구예요. 아무리 실화 소설이라도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허구가 반쯤은 섞이는 법이지요.”
여학생은 묵묵히 내가 건네준 소설을 읽었다. 
끝부분을 읽어갈 즈음, 내가 물었다. 

[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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