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 국무회의나 비상 대책회의에서는 밤낮 머리를 맞대고 있었으나 뾰족한 대응책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되니까 합동 수사본부와 경찰, 군부를 졸라대는 끈을 더욱 조였다.

합동 수사본부에서 주로 백 장군을 추적하고 있던 곽 경감에게 좋은 소식이 들어왔다.

백 장군, 아니 백성규 대령이 살던 집을 감시하고 있던 요원이 그 집에 들어 가려든 한 여자를 연행해 왔다. 그 여자는 집에서 백성규를 기다리고 있는 노인과 아이들에게 생활비를 전하려고 했던 것 같았다.
“이름이 뭐요 아가씨.”

곽 경감은 연행해온 여자와 마주 앉았다. 갓 스물을 넘은 듯 앳 되 보였다.
짧게 깎은 머리와 화장기 없는 얼굴, 꾹 다문 작은 입, 얇은 입술, 초롱초롱한 눈동자 등이 만만찮은 여자임을 첫눈에 느끼게 했다.
이목구비가 선명하고 호리호리한 체격이 지성적인 얼굴과 잘 어울렸다.
“이름이 무엇이냐니까?”

곽 경감이 웃어 보이면서 물었다. 합수본부의 이 깊숙한 방까지 들어올 때는 상당한 절차를 거쳐 벌써 신원이 다 나와 있었지만 곽 경감은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태도로 여자를 다루었다. 딱딱한 취조실이 아닌 포근한 소파로 여자를 데리고 오게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여자는 입을 꼭 다문 채 단단한 결심이라도 한 사람처럼 보였다.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임채숙이에요.”
굳게 다물고 있는 입이 열렸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 나왔다.
“직업은?”
곽 경감이 역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까 다 말했어요.”

여자가가 고개를 들어 경감을 빤히 쳐다보았다. 곽 경감은 문득 집에 있는 외동딸 나미의 얼굴이 떠올랐다. 왜 나미
의 얼굴이 하필 이때에 떠올랐는지 모를 일이었다.
“학생이라고 했던가?”
“관악대학 문과대 역사학과 2학년인데 지금은 휴학 중입니다.”
뜻밖에 또박또박 대답을 했다.
“왜 휴학을 했지요?”
곽 경감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켜지지 않는 지포 라이터를 뒤이어 철거덕거리기 시작했다.

“데모하다 도망 다니게 되어서였어요.”
“그럼 지금도 도망 다니고 있는 거요?”
“아뇨. 수배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그래서 다시 복학을 할까 하고 생각 중이었어요.”

“왜 데모를 했지요?”
여자는 아무 말도 않고 다시 곽 경감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왜 데모를 했느냐니까?”

곽 경감이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이 보고 있다가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질문을 하면서도 참으로 바보 같은 질문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을 하니까 여자의 시선이 갑자기 따갑게 느껴졌다.
“그건 우리가 왜 그렇게 해야만 하는지, 이 나라를 그렇게 만든 사람들에게 가서 물어 보세요. 아마 선생님도 그런 사람 중의 한 분일 겁니다.”
“아버지는 무엇을 하시나요?”

곽 경감은 관념적일 질문을 해서는 안 된다고 느꼈다.
“공무원이었는데 지금은 그만 두었습니다. 아버지는 나와 생각이 좀 달라요.”
곽 경감은 다시 여자의 신원 기록을 넘겨보았다. 경제 관계 부처의 고위직 공무원이었다. 명예퇴직을 한 뒤 지금은 어느 재벌 회사의 고문으로 있다고 되어 있었다.
“백성규 씨하고는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

“이 돈은 누구한테서 받았나요?”
곽 경감이 편지지 같은 것에 둘둘 말려 있는 5만 원짜리들을 펴 보면서 물었다.
“왜 그런 걸 물어봐야 합니까? 그곳은 생활 능력이 없는 불쌍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 좀 도와주는 게 그렇게 잘못된 일인가요?”
“묻는 말에만 대답해요!”
곽 경감이 언성을 조금 높였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지만 내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정당한 법적인 절차를 밟아서 죄를 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여기가 도대체 어디예요? 그 유명한 내각 정보국이라는 곳입니까? 내가 지금 체포 된 상태인가요?”

곽 경감은 더 씨름을 해 보았자 얻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이 곳에 파견되어 있는 육군 소속 수사 요원 한 사람이 들어왔다. 광대뼈가 툭 불어지고 눈썹 끝이 위로 치켜져 올라가 험상궂게 보였다.
“경감님 이런 애들은 그렇게 곱게 다루어 가지고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제가 좀 데리고 가서 알아보지요.”

험상궂은 사나이는 백성규의 집을 방문했을 때 같이 갔던 전광대라는 40대의 수사관이었다. 성격이 과격하고 끈질기다고 곽 경감은 생각했다.
“이런 년은 몽둥이찜질을 해야 불낍니더. 머리에 먹물 든 연놈들은 말로는 안되는기라요.”
전광대가 임채숙의 팔을 쥐고 일으켜 세웠다. 갑자기 억세게 팔을 잡힌 임채숙은 아파서 얼굴을 찌푸렸다.
“빨리 따라와!”

전광대는 여자를 끌고 방을 나갔다. 곽 경감이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너희들 연약한 경찰관들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는 투였다. 
곽 경감은 기분이 확 상했으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곽 경감은 여자가 전해 주려고 한 돈 뭉치가 든 봉투를 다시 열어 보았다. 봉투를 유심히 살폈으나 특별한 흔적이 없었다. 보통 문방구점에서 파는 흔한 편지봉투였다.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곽 경감은 다시 돈을 싼 종이를 살펴보았다. 가로로 줄이 쳐진 편지지였다.
그런데 편지지 맨 아래 칸밖에 조그만 글씨가 쓰여 있었다.
‘노량기업’

곽 경감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노량기업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모르지만 이 돈과 관계가 있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곽 경감은 상공회의소나 중소기업 협동조합 등을 통해 노량기업의 주소를 알아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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