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살인임에 틀림없다. 김 묘숙(金描淑) 박사는 인삼정제를 남부터 나눠 주는 습관이 있으니 자신은 항상 다섯 번째로 캡슐을 받게 되는 것이다.

네 사람은 누구나 김 묘숙의 사무실에 손쉽게 들어갈 수 있다. 사무실로 몰래 들어온 범인은 인삼정제를 바꿔치기하여 청산가리를 넣은 캡슐을......

이런 생각을 하다가 강형사는 피식 웃어 버렸다. 김 묘숙이 죽은것은 그 인삼정제 캡슐을 먹고도 한 시간 이상이나 지나 마석의 별장에서였기 때문이다.
“자넨 상상력이 지나쳐.”

추경감의 비웃는 듯한 소리가 떠오르자 강 형사는 잠마저 싹 달아났다.
자리에서 일어나 담배를 꺼내 물고 사건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최첨단 과학으로 반도체와 함께 자광을 받는 유전공학으로 크게 이름을 날린 주식회사 무진(茂進). 그 무진의 둥이라 할 만한 김묘숙 박사.

재작년 <배추 당근>이라 불리는 배추 뿌리에 당근이 생기는 식물을 개발해 일약 여류 사가 된 서른여섯 살 미모의 여인. 그 여자가 7월 23일 자살을 한 것이다. 아니, 시체로 되었다. 현장은 서울 회사에서 근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마석의 한 별장이었다. 절벽 사이에 려하게 서 있는 한 별장.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 무진의 사장이며 김묘숙 박사와 외가로 먼 척이 되는 변 국보(卞國寶) 사장. 나이 지긋한 초로의 신사였다. 그리고 무진의 경리를 담당하고 는 이 술균(李術筠) 이사. 까무잡잡하고 깡마른 사내. 사고가 일어난 별장의 주인이다.

무진의 기술담당 이사로 김 묘숙과 함께 무진을 떠받치는 장 주석(長主錫) 이사도 와 있었다. 몸무게 백여 킬로그램의 뚱보다. 이 외에 별장지기 천 경세(千經世)와 운전기사 우(朴仁雨)가 있었다. 별장은 때 아닌 사건 현장이 되어 경찰이 초동수사를 시작했다.

“아아, 곧 신제품이 나올 이 중요한 때에...”
변 사장이 추 경감과 강형사를 맞아들이며 길게 탄식을 했다.
“신제품이라뇨?”

추경감은 주름투성이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지금 한가롭게 그런 것이나 물어 볼 때냐는 듯 강형사는 시체가 있는 방으로 걸어갔다.
“사과가 열리는 장미나무지요.”

힘없이 대답하는 변 사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체는 텔레비전 쪽으로 엎어진 자세였다. 텔레비전이 켜진 채 잡음을 내고 있었다.
“저건 뭡니까?”
이 이사에게 물어 보았다.
“김 박사가 혼자 있기 심심할 것 같아 비디오를 보라고 했는데 아마 테이프가 다 돈 모양입니다.”

“비디오요? 제목이 뭐죠?”
“<황혼에 지다>라는 애정 영화요.”
이 이사는 허둥지둥 말을 내뱉었다.

“강형사, 뭐 좀 알아냈어?”
추 경감이 방으로 들어왔다.
“아뇨, 뭐 별로.”
“음, 그래...”

추 경감은 무심하게 방을 둘러보았다.
“다른 분들은 뭣들 하고 계셨던가요?”
이 이사 얼굴이 잠깐 씰룩거렸다.
“옆방에서 화투를 좀 쳤습니다. 우리가 화투 치는 동안 김박사는 옆방에서 혼자 비디오를 보고 있었는데...”
“노름을 하셨군요?”

강 형사가 입바르게 끼어들었다.
“그저 점당 백으로 소소하게......”
이 이사는 멋쩍은 듯 말을 이었다.
“사내들이란 게 모이면 으레.....”
“괜찮습니다. 그런 걸 따지자는 게 아닙니다.”
추 경감이 또 웃으며 말했다.

“김  묘숙 박사가 옆방에 혼자 있는 동안 여러분은 계속해서 화투만 치고 있었군요.”
“예.”
김묘숙의 몸에는 외상이 전혀 없었다.

[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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