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진방 남원의 첩실 일타의 집은 불길에 휩싸여 밤을 낮처럼 밝혔다.
“우리 집 마루 밑에 어떤 뚱뚱한 놈 하나가 상투바람으로 숨어 있습니다.”
웬 사나이가 뛰어나와 정안군 방원 앞에 고했다.
“댁은 뉘시오?”
이숙번이 물었다.

“저는 여기 사는 민부(閔富)라는 사람입니다. 전에 판사를 지냈습니다.”
“숨어 있는 그놈 모양이 정도전임에 틀림없었다.”
“들어가서 정가 놈은 끌어내라.”
이숙번이 소리치자 갑사 여러 명이 우르르 민부의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죽이지 말라.”
정안군이 소리쳤다.
소근과 다른 세 명의 갑사가 조금 뒤에 정도전을 개 끌듯이 끌고 나왔다. 벌써 초주검이 된 정도전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손에는 단검을 꼭 쥐고 있었다.
정안군이 칼을 뺏으라고 명했다.

소근이 발로 정도전의 턱을 차고는 칼을 뺏으려 했다. 그때였다. 정도전이 벌떡 일어서더니 칼을 팽개치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나를 죽이지 말라. 한마디만 하게 하라!”
어디서 그런 소리가 나왔는지 모두가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말에 탄 방원과 입에 피를 문 채 상투바람의 정도전이 마주 서서 불꽃 튀듯 서로 노려보았다.

정도전은 핏발이 선 눈으로 장안군을 노려보며 한참동안 서 있었다.
“이제 와서 나에게 무슨 할 말이 있단 말이오.”
정안군 방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공은 왜 이런 일을 저지르시오. 일찍이 주상 전하와 함께 흥국사에서 맹세를 하고 나라를 일으킨 일을 잊었단 말이오?”
정도전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공이야말로 딱한 사람이오. 조선의 봉화백 자리에 있으면서 무엇이 부족해 작당을 해 나라를 그르치려고 하오? 사직을 공의 손아귀에 넣고도 부족해 통째로 삼키려고 하다니……. 죽은 현비의 그늘 아래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이 나라 왕통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으니 그도 딱한 일이고 게다가 나라를 사욕 아래 두려하다니…….”
“그게 무슨 당치도 않은 역설이오.”
정도전이 목청을 높였다. 종 소근이가 흥분해 정도전의 목에 칼을 가져다 댔다. 정도전이 움찔하며 비켜섰다. 그러나 다른 무사들이 그의 팔을 잡고 방원의 말 앞에 꿇어 엎드리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방원은 그냥 두라고 말했다.

“공은 <경제문감>이란 책에서 모든 정사의 결정권, 병마권, 재정권 등 모든 실권을 한 사람이 쥐어야 한다고 주장했소. 그 한 사람이란 것이 왕이 아니라고 했소. 왕이 아니면 그 사람이 누구요? 바로 그대 봉화백 아니오? 그게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은 다 알 거요. 공은 판삼사사가 되어 이 나라의 모든 논밭 토지에 관한 권한을 다 쥐었고, 삼군부를 손아귀에 넣어 병마권을 쥐었고, 파당을 구축하여 모든 정사의 결정권을 쥐었소. 그 다음은 뭐요? 왕손들을 없애고 그대가 주장하는 방벌(放伐)을 이루자는 속셈 아니오? 죽어 마땅한 죄요!”

“그것은 대군이 크게 오해한 것이오. 나는 순리적으로 주상 전하가 선택하신 왕통을 지키려 한 것뿐이오.”
“방자하다!”
그때 이숙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저 자가 아직 주둥이가 살았군.”
이번에는 마천목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대군은 임신년에도 나를 살려준 일이 있소. 이번에도 살려주리라 믿소. 나는 방벌을 꿈꾼 일이 없소이다. 그것은 전 왕조를 밀어내야 한다는 뜻일 뿐이오.”
“그대는 전하가 가짜 왕조 신돈의 핏줄 우와 창을 쫓아내고 새 왕조를 일으킨 것을 핑계 삼아 왕손들을 다 없애고 역성혁명, 아니 방벌의 수단으로 혁명을 일으키려고 한 죄인임이 다 탄로났소. 그러니 죽음으로 그 죄를 씻어야 하오.”
“대군이 지금 하는 일은 대역에 해당하는 일이오. 전하의 윤허를 얻어서 지금 군사를 일으킨 것이오? 사사로이 군사를 일으켜 나라의 중신들을 해치는 것은 반역이 아니오?”
정도전이 피를 뿜어내며 소리를 질렀다.

“반역은 그대가 먼저 저지른 것이오!”
방원도 눈을 부라렸다.
“꼭 이렇게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전하에게 상계上啓하여 조정의 공론을 거쳐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전하께서 내가 죽어야 한다면 달게 따르겠소. 그러나 야밤에 몰래 사병을 일으켜 중신을 마구 가두고 죽이는 것은 천추에 용납 안 될 역모요.”
“역적모의를 한 주제에 무슨 변명이 그렇게 많은가? 여봐라, 저 역신의 입을 영원히 봉하라!”

방원이 그렇게 말하고 말고삐를 돌렸다.
“대군…….”
정도전의 절규가 채 끝나기도 전에 종 소근이 들고 있던 칼로 정도전의 가슴을 찔렀다.
“으음……. 네놈들이…….”
정도전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소근이 다시 들고 있던 철퇴로 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는 처참한 모습을 횃불이 비추고 있었다.
“왕, 왕후 마마…….”

정도전은 말을 잇지 못한 채 땅에 엎어졌다. 그 위에 소근이 다시 짓이기다시피 철퇴질을 해댔다.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끔찍한 광경이었다. 정안군 방원. 진취적이고 사려 깊은 장부요, 정의를 숭상하는 무장으로만 알았는데 그의 심장이 저토록 잔인무도한가?
그리고 그를 따르는 자들은 마치 피에 굶주린 이리 같지 않은가? 저런 사람이 정권을 휘두르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렇게 하여 고려의 형부상서 정운경(鄭云敬)의 아들로 태어나 우여곡절 끝에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일으키고 제도와 문물의 개혁을 주장하던 당대의 인물 봉화백 정도전은 50대의 나이로 처참하게 죽었다.
정도전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선혈로 물든 수진방 솔재, 일타의 집 앞 유혈 참살은 계속되었다.(본문 중에서)

서장. 2

세조(世祖) 방원은 상소문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미간이 꿈틀거렸다.
“정녕 피할 수 없는 건가? 정녕…….”
점점 더 얼굴에 노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상소문을 옆으로 홱 내던진 세조는 장대한 몸을 일으켰다.

거사를 결정하던 때에도 떨리지 않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세조는 손을 내밀어 한 자 반 가량 되는 비취 불상을 거머쥐었다. 이제 더 이상 손이 떨리지 않았다. 결정을 내린 것이다. 반합을 열어 얇은 책자 하나를 꺼냈다. 갈색 표지 위에 <무인록>(戊寅錄)이라 적혀 있다. 세조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책자는 바로 구겨졌다.
“에잇!”
세조는 비취 불상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천축국에서 건너온 비취 불상이 두 덩이로 쪼개지고 말았다. 무서운 힘이었다. 세조는 그 위에 다시 <무인록>을 집어던졌다.
“태워라.”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내관들은 황망해하며 비취 불상과 <무인록>을 집어들었다. 세조가 살기를 담은 눈으로 내관들을 보며 말했다.
“절대 아무도 저 책을 읽어서는 안 된다.” 
“주상 전하, 노기를 거두십시오.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이옵니다.”
내관들이 허리를 숙이고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세조는 고개를 들어 마치 하늘에 있는 누군가에게 말하듯이 중얼거렸다.
“골육을 치지 말라 경계하셨으나 이제는 기호지세(騎虎之勢)라 어쩔 수 없습니다. 왕조를 위해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옵소서.”
세조의 뇌리에는 아버지 세종(世宗) 때 만들었던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첫 구절이 스쳐갔다. 왕조의 무궁을 기원한 그 노래 구절을 세조는 조용히 읊조렸다.
“해동(海東) 육룡(六龍)이 날으사 일마다 천복(天福)이시니…….”

비취 불상은 육룡의 마지막 용인 할아버지 태종이 물려준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필요없었다. 왕조를 위해서 이제는 버려야 할 물건이었다.
이날 노산군(魯山君단종)이 유배되어 있는 청령포로 금부도사가 떠났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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