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형은 그의 말은 듣지 않고 호랑이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그러나 이게 웬일, 화살을 맞을 호랑이는 더욱 사나워져 이원계에게 덤벼들어 요절을 내버렸다.

이성계는 형을 잃고 울면서 산을 내려왔다. 산 밑에 이르자 그는 허탈감과 갈증으로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때 시냇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한 처녀가 눈에 띄었다. 숱이 많은 머리를 치렁치렁하게 땋아 늘인 것으로 보아 처녀임이 분명했다.
흰 피부와 갸름한 얼굴, 또렷한 이목구비가 첫눈에도 드물게 보이는 미인이었다. 태조는 그 처녀에게 마음이 끌려 자신도 모르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낭자, 목이 말라 그러니 물 한 모금만 얻어 마실 수 있을까요?”

처녀는 빨래하던 손을 멈추고 다소곳이 일어서 우물에서 바가지로 냉수를 떠 올린 뒤 버들잎을 띄워 고개를 숙인 채 바가지를 내밀었다. 이성계는 물 한 모금을 얻어 마시며 그렇게 심장이 뛴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고 뒷날 여러 번 회고했다고 한다.
이미 한씨라는 부인이 있는 이성계는 그 이후 줄기차게 처녀를 찾아가 마침내 그 아버지인 강윤성康允成의 허락을 얻어내고 제2부인인 경처로 삼게 되었다.

제1부인 한씨는 이성계가 왕이 되기 이태 전에 세상을 떠나 신의왕후(神懿王后)로 추존되고, 실제로 왕후의 자리에 오른 사람은 강씨 현비였다.
그날의 로맨스를 목숨이 경각에 달린 현비지만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신 상궁은 눈물을 글썽이며 그 이야기를 김용세에게 해주었다. 이야기가 끝날 무렵 윤 판사가 돌아왔다는 전갈이 왔다.
“전하께서 어인 일로 이 시각에…….”

윤 판사도 적이 당황해하는 눈치였다.
“잘은 모르오나 중전 마마와 관련된 일을 하명코자 하는 것 같습니다.”
김용세는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평소에 자신의 불길한 예견이 자주 들어맞아 스스로의 능력에 경악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신 상궁을 따라 들어간 윤신달 판사는 퇴궁 시간이 다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김용세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가 중전 현비 강씨가 간밤 이득분의 집에서 운명했다는 것을 안 것은 낮 정오께나 되어서였다.
현비의 운명 사실은 사시(巳時), 즉 오전 10시께부터 궁 안에 알려졌다. 전하가 조회를 취소함으로써 당하관 사람들에게도 알려졌다. 정오에는 예조(禮曹)에서 중전 현비의 승하를 정식으로 공표했다.

세자를 비롯한 모든 대소 신료들이 삼베를 두르고 경건한 마음으로 장례 준비에 임했다.
문하부 정승들을 중심으로 국장을 치르기 위한 준비가 시작되었다. 빈궁殯宮 설치에서부터 산역에 이르는 일을 맡을 4개의 도감(都監)과 13개의 소所가 설치되었다.
예조에서는 장례를 치르는 절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전 왕조 전례에다 주자 가례나 문공 가례를 새로이 해석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상감은 격식에 구애되지 말고 불교 의식을 잊지 말라고 명했다. 전국 지방 관서에도 파발마를 보내 국상을 알렸다. 그러나 지방 광원이 전하를 위문하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오는 일은 금하라는 왕명을 예조가 공표했다.
궁 내외에는 육류를 배제한 소식만을 먹게했다.

태조 5년 8월 13일. 왕비가 한 많은 어린 세자 방석(芳碩)을 두고 눈을 감은 첫날은 이렇게 저물어갔다.
이득분의 집에서 소렴을 마친 현비의 시신은 오후 늦게야 궁으로 옮겨졌다. 경복궁으로는 들어오지 않고 뒤편 북악산 쪽에 있는 옛 궁궐인 남경궁에 시신이 안치되고 그곳에 빈궁이 설치되었다. 궁전에는 독경승이 가득하여 울음소리와 경 읽는 소리가 그치지 않고 밤을 밝혔다.

독실한 불제자인 현비를 위해 전국의 사찰에서도 부음이 닿는 대로 명복을 비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수많은 사람이 슬퍼했지만 그중에도 전하와 왕세자의 슬픔은 누구도 이해 못하는 애절함이 있었다. 전하는 그날 오후 빈궁에서 강령전으로 돌아온 후로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혼자 있었다.

강령전의 동소침인 연생전(延生殿)이란 침실에 들어가 있었다. 왕비의 침실인 교태전이 있지만 거의 쓰지 않았다. 강령전의 동서쪽에는 두 곳의 침전이 있는데, 현비가 주로 취침하던 방은 동쪽의 연생전이었다.

흰 저포 차림을 한 전하는 방안에 단정하게 앉아 평소 현비가 불공드리던 비취 불상을 바라보았다. 뜨거운 눈물이 두 뺨을 적셨다.
삭풍이 몰아치는 동북 변경에서 여진족 전사들을 쫓아 준마를 달렸으며, 왜구의 창날을 뚫고 도검과 화살을 날리던 영웅 이성계의 가슴이 애틋한 그리움과 눈물 섞인 회한으로 가득 찼다.

원래 왕이 취침하는 방에는 아무런 가구나 장식을 두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곳 현비의 방만은 천축국(天竺國) 비취 불상 한 구가 놓여 있었다. 현비는 비록 왕비이지만, 한 인간으로서는 지아비의 후처이고 여섯 남매의 계모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남모르는 고뇌가 왜 없었겠는가? 그럴 때마다 부처에 의지해 고뇌를 삭였을지도 모른다.

눈물 속에 건너다 보이는 비취 부처님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왕은 그 미소가 자꾸 슬프게만 보였다. 한 손은 무릎 위에 놓고 다른 한 손으로는 얼굴을 고이고 있는 반가사유상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고뇌를 나누어가지는 것 같은 안온함을 느끼게 한다. 부처의 미소가 곧 현비의 미소로 바뀌었다.

왕은 방안을 둘러보았다. 이제 다시는 그 모습을 볼길 없는 현비의 숨결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원래 궁전에는 왕비의 침실은 정해져 있어도 공식적인 왕의 침실은 없는 법이었다. 아마도 왕의 신변 보장을 위해 그렇게 했는지도 모른다.
“지화!”
왕이 조용히 불러 보았다. 참으로 몇 십 년 만에 불러보는 이름이었다. 지화란 현비의 아명이었다.

왕이 눈을 감았다. 이 방에서 수없는 밤을 함께 보낸 지화를 떠올렸다.
“소첩, 문안 올립니다.”
옥빛 당저고리에 다홍 슬란(膝欄) 치마, 남빛 웃치마를 받쳐 입고 다소곳이 들어오는 현비의 모습이 그렇게 요염할 수가 없다.
“어서 들어오오.”
왕은 현비의 손목을 덥석 잡고 끌어안았다.
“아이, 마마도 급하시긴.”

현비가 장지문을 향해 눈을 흘겼다.
사방이 장지문인 이 침실은 주위에 아홉 칸의 방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방마다 늙은 지밀 상궁들이 지키고 앉아 왕과 왕비의 기척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현비나 왕은 그것이 몹시 싫었다.
“어흠, 어흠!”

왕이 일부러 큰기침을 했다. 직숙(直宿) 상궁들은 물러가거나 서소침 곁방에라도 가라는 신호였다. 직숙은 대개 분방 상궁인 신 상궁과 제조 상궁, 부제조 상궁 등이 들었다. 젋은 나인이나 항아들은 침실 직숙 방에 넣지 않았다. 조금 있다가 상궁들이 물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현비, 어서 이리 오오.”
왕이 현비를 와락 끌어안고 당저고리 고름을 풀었다.
“아이, 소첩이 할게요.”
현비가 차근차근 겉옷을 벗었다. 보드라운 명주 속옷까지 다 벗자 왕이 여섯 개의 촛불을 껐다.

왕은 강씨를 맞이한 이후 본처인 한씨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강씨가 궁에 들어와 현비가 된 이후에도 다른 궁녀들 역시 눈여겨보려고 하지 않았다. 오직 현비 한 여자만 품으려고 했다. 현비는 타고난 가녀린 몸매에다 둥그스름한 얼굴 그리고 얇은 입술과 눈썹 등이 대단히 육감적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후덕이 넘치는 국모상이라기보다는 아름답고 재기에 넘치는 비범한 여인상이라고 해야 옳았다.

왕은 나이와는 달리 아직도 억센 팔로 가녀린 현비의 허리를 껴안아 아랫배에 밀착시켰다. 
“왕 자리를 내놓더라도 임자는 못 내놓겠어.”
왕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
“소첩두요.”

현비의 숨결도 말을 잇지 못할 만큼 가빠졌다. 운우의 정이 절정에 이르자 가쁜 숨은 신음 소리로 변하고 신음은 연생전 넓은 침실을 가득 메웠다. 왕이 여기까지 회상하며 꿈에서 채 깨어나기도 전이었다.
“마마! 조준(趙浚) 대감 입시옵니다.”
제조 상궁의 목소리에 자세를 가다듬고 앉아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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