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왕의 슬픈 사랑

태상왕께서는 신의왕후를 지극히 사랑하사 한시도 잊으시지 않았으며 정릉을 잡으시매 온갖 보배를 부장하시고 언제나 능에 거동하시었도다. - <무인록>

영추문 위로 긴 그림자를 늘어뜨린 느릅나무 잎이 일영대(日影臺)에 그림자를 드리울까 봐 서운관(書雲觀) 승직에 서있는 김용세(金容笹)는 신경이 쓰였다. 일영대란 해시계의 일종으로 돌 위에 시각을 알리는 금을 긋고 영침이라는 막대를 세워 그 그림자를 보고 시각을 짐작하는 장치이다.

추분이 눈앞에 다가왔다고는 하지만 아직 햇볕은 제법 뜨거웠다.
“미시未時(오후 2시경)라, 아직 당상관 나리들이 퇴청하려면 한식경은 더 있어야겠구나.”

김용세는 혼자 중얼거리며 단청이 잘 된 영추문 위의 푸르고 높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서운관은 새 궁전인 경복궁의 서쪽 정문인 영추문 옆에 있었다. 그는 짙푸른 하늘을 보자 눈물이 핑 돌았다.
이미 고인이 된 지 이태도 넘는 아내 동의(童懿)가 문득 생각났기 때문이다. 원인 모를 병으로 시집 온 다음 해부터 앓기 시작해 이태 만에 남편 용세가 등청해 있는 사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요즘은 중전 현비(顯妃) 강씨(康氏)가 병마에서 벗어나지 못해 궁 안도 뒤숭숭한 판이다.
“윤 판사 대감 계십니까?”
일영대 옆에 서 있는 김용세 앞에 한 궁녀가 나타나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이 서른 가까운 그녀가 현비의 본상궁으로 있는 신씨辛氏라는 것을 김용세는 금방 알았다. 콧날이 좀 평평하기는 하나 여자로서는 걸음걸이가 활당하고 키가 커 이국적 풍모가 엿보이는 궁녀였다. 그녀가 상감의 지밀 상궁이 된 것은 상감이 왕이 되기 전 사가(私家)에서부터 상감을 모셨기 때문이다.

왕이 동북면 영흥에 있을 때 거두어들였던 여진족 여아였다. 전쟁통에 홀로 남겨진 아이를 부인 한씨(韓氏)가 불쌍하다고 거둬들여 기르게 된 것이었다. 그녀가 이국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것도 이런 연유였다. 본래 본가에 있었지만 왕이 현비와 만난 이후로는 그녀를 개경의 강씨 집에 두어 현비의 시중을 들게 했다. 그후로 쭉 현비를 모셨으며 궁에 들어와서도 현비를 따라다니며 병구완을 하고 있다가 지금은 잠시 지밀 상궁의 일을 맡고 있었다.

김용세와는 초면이 아니었다. 평소 현비가 서운관에 일이 있을 때는 상궁을 자주 심부름시켰기 때문이다. 일관의 일에서부터 천문, 풍수, 지리, 길일 선택 등을 서운관에서 했기 때문에 왕비의 심부름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윤신달(尹莘達) 대감 말씀입니까?”
김용세가 신 상궁을 마주보지 않고 엇비슷하게 서서 물었다. 정3품 판사 윤신달은 서운관의 책임자 격이었다.

“그렇습니다. 전하께서 급히 찾으시온데…….”
신 상궁의 태도나 말투에서 김용세는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것 같은 불안을 느꼈다.
‘윤 판사를 찾는다면 혹시 중전 마마가…….’

김용세는 혼잣말을 되뇌고 앞서 걸으며 신 상궁을 따라오게 했다. 만약 중전이 승하했다면 지금부터 일은 더욱 복잡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언뜻 머리를 스쳤다. 강령전 뒤뜰에서는 중전 현비의 쾌유를 비는 독경 소리가 이틀째 그치지 않고 있다.

현비의 병이 점점 깊어지자 가장 애간장을 태운 사람은 전하였다. 그는 현비를 내시부 판사 이득분(李得芬)의 집으로 피접을 보내놓고는 하루에도 두세 차례씩 현비의 용태를 물었다. 직접 궁을 나서 이득분의 집을 찾아가 현비의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인 적도 있었다.

궁 안의 여러 전의들에게 큰 상을 내릴 테니 왕비가 건강해질 비법을 찾아내라고 조르기도 했다. 왕이라는 위치를 떠나 한 지아비로서 아내를 살리고자 하는 그 충정이 참으로 애처로웠다.
독실한 불교 신자인 현비를 위해 이틀 전부터 회암사를 비롯한 여러 사찰에서 법승 108명을 불러다 쾌유독경을 주야를 통해 그치지 않도록 했다.

그뿐 아니라 왕은 통도사에 있는 부처의 진신 사리를 회암사에 옮겼다가 다시 궁으로 가지고 오도록 하여 그 신통력을 빌리려 했다. 어젯밤에는 2경(二更)에 이를 때까지 왕이 직접 독경에 참여하기도 했다.
“윤 판사 대감은 예조에 일이 있어 가셨는데 곧 돌아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겠습니까?”

김용세가 정중하게 물었다. 비록 내명부에 있는 여자지만 품계로 보면 높은 위치에 있었다.
“어쩌나…….”
신 상궁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얀 살결에 나이를 잊은 듯한 복사꽃 뺨이 그녀의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사실 그녀는 어린 나이 때부터 현비를 모셨기 때문에 아직도 청춘인 여인이었다.
“여기 누국(漏局)에 들어가 잠시 쉬시지요.”

김용세는 신 상궁을 데리고 누국에 들어가 잠시 쉬도록 권했다. 누국이란 물시계를 설치하고 시간을 관리하는 곳이었다. 보통 일영대나 일구日咎라고 하는 일종의 해시계로 시간을 보지만, 흐린 날이나 밤에는 이 물시계를 이용했다.
“중전 마마의 환우는 좀 어떠신지요?”
김용세는 앉아 있는 신 상궁의 옆에 돌아선 채로 궁금한 것을 물었다.
“대단히 위중하십니다.”

“피접 가신 일은…….”
“전하의 수심만 더욱 늘었지요. 어찌나 보기에 안 되었던지.”
신 상궁이 말끝을 흐렸다. 신 상궁이 눈물을 훔치며 상감이 내시부 이득분 판사의 집에 들었을 때의 모습을 이야기 했다.

이득분 가의 안채에 들어온 왕의 모습은 체통 따윈 버려버린 한 지아비였을 뿐이었다. 왕은 뼈만 앙상하게 남은 채 일어나려고 애쓰는 현비의 두 팔을 덥석 잡고는 눈물이 글썽해졌다.
“곤전, 이 모습이 웬일이요? 정말 눈뜨고 못 보겠소.”
왕은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가 옆에서 읍하고 있는 내시부 이 판사에게 말했다.
“잠시 곤전과 둘만 있게 해주겠나? 아니, 홍아(紅兒)는 있어도 괜찮네.”

홍아란 신 상궁의 이름이다. 상감이나 현비는 그녀를 늘 그렇게 불렀다. 왕이 되기 전 개경의 사가인 싸릿골에 있을 때부터 그렇게 불렀다.
방 안의 승지, 신료들이 다 나가고 신홍아 상궁만 허리를 굽히고 문 앞에 서 있었다.
왕은 지극히 안타까운 용안으로 곤전을 바라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곤전.”
“예.”

현비가 힘겹게 대답했다.
“곤전, 곡산의 우물터 생각나오?”
뜻밖의 질문에 한참 숨을 죽이고 있던 현비가 대답했다.
“전하께서는 별 묵은 일도 다 이르십니다. 그 일을 신첩이 재가 된들 잊겠습니까?”

현비의 눈동자가 갑자기 초롱초롱한 별빛처럼 반짝였다.
“아직도 그때의 도화 같던 아름다움은 그대로구려.”
왕은 현비의 가녀린 손목을 들어 자신의 뺨에 문지르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신첩을 용서하십시오. 용안을 눈물로 얼룩지게 한 이 죄를 용서하십…….”
현비는 목이 메어 말을 마치지 못했다.

곡산의 일이란 지금부터 30여 년 전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을 말한다.
태조가 험산을 넘나들며 솜씨를 익히던 10대 때의 일이었다. 아버지 이자춘李子春의 생신을 앞두고 이성계는 그의 이복 형 이원계(李元桂)와 함꼐 생신 상에 쓸 고기를 사냥하러 나갔다. 그들은 사흘 동안이나 산을 헤매 다녔으나 노루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빈손이었다.

“형님, 여기처럼 깊은 산 속에 한 마리의 짐승도 없다는 것은 뻔한 일입니다.:
이성계가 계속했다.
“이곳에 무서운 범이 살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우리도 호환을 당하기 전에 빨리 산을 내려가는 것이 상책인 것 같습니다.”
이성계의 말이 옳은 것 같아 두 형제가 막 발길을 돌리려는데 이변이 생겼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황소만한 호랑이가 두 형제 앞을 가로막았다.
“형님! 빨리 달아나요.”

이성계가 뛰면서 고함을 쳤다. 그러나 형 이원계는 화살을 뽑아들고 호랑이를 겨누었다.
“형님! 어쩌시려고 이러십니까? 저놈은 예사 놈이 아닙니다. 빨리 도망쳐요.”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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