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에 들라 일러라.”
말을 마치자 왕은 다시 비취 불상을 바라보며 눈물을 의수로 훔쳤다. 
봉상시와 산기상시 그리고 서운관이 예조와 협력해 장의 절차를 밟아나가기 시작했다. 김용세는 윤신달 판사, 유한우(劉旱雨) 부정(副正) 등과 함께 능터를 잡는 일에 배속되었다. 그는 삼베 단을 단 간이 상복을 입고 빈궁 마당으로 서둘러 나가 보았다.
평소 현비의 부름을 받고 가끔 서운관에 있는 비기(秘記)들을 설명해 주면서 본 현비의 얼굴은 온화하지는 않았지만 오묘한 아름다움을 지닌 여자라고 생각했었다.

현비가 관심을 가진 것은 언제나 막내 아들인 세자 방석의 운명에 관한 것이었다. 그녀는 세자와 그의 동복 형인 방번(芳蕃)이 누군가에 의해 위해를 당할 것이란 공포에 싸여 있었다. 그 누군가라는 것이 이복형 방원(芳遠)임을 의식하는 점이란 것을 김용세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운관에 있는 어떤 비기도 그것을 속 시원하게 풀어주지는 못했다.

이런 입장은 방원 쪽에서도 마찬가지 였다. 김용세가 방원의 심부름도 자주 했는데, 그 내용인즉 방번이나 방석의 운명에 관한 것이었다. 빈궁 뜰에는 대소 신료들이 바쁘게, 그러나 경건하게 움직였다. 당대의 실세로 모두가 우러러보는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의 얼굴이 보였다. 훤칠한 키에 출중한 인물이 비범하게 보였다. 그는 왕을 도와 이씨 왕조를 세운 일등 공신으로 지금은 판삼사사(判三司事) 겸 삼군부 판사, 삼도 도통사라는 막강한 자리에 있었다.

조선조 초기에는 조정의 직제를 고려조대로 쓰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판삼사사란 삼사라는 부서의 판사라는 뜻이다. 당시의 품계나 직제에는 제일 첫자(판)와 제일 끝자(사)만을 따서 호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도전이 맡고 있는 삼사란 나라의 회계와 곡물 등 재정에 관한 것을 모두 쥐고 있는 중요한 자리였다. 또한 삼군부와 삼도 도통사란 전국의 병마권을 모두 가리키는 말이다. 명실 공히 국권을 쥐다시피한 사람이었다.

정도전은 평소 현비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주위의 시샘을 사기도 했다. 현비는 삼봉이야말로 충성심 강하고 인물이 출중해 남자 중의 남자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 여자로서 그를 흠모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뜰에는 그 밖에도 세도가 문하부 참찬 남은(南誾), 세자 방석의 장인인 심효생(沈孝生), 상장군 박포(朴苞), 이거이(李居易) 부자, 하륜(河崙), 이숙번(李叔蕃), 무학대사(無學大師)로 불리는 자초(自超) 등이 보였다. 모두가 침통한 표정이었다.
현비의 빈궁이 옛 궁전에 설치된 지 사흘째 되는 날 이었다. 왕은 빈소에 들르는 일 외에는 강령전에서 두문불출하면서 조회도 열지 않았다. 정사는 도당 정승들이 알아서 하라는 말만 전했다.

보다못한 정승들이 현비를 추모하고 전하를 위문하는 글을 지어서 강령전으로 가지고 갔다. 고려조 떄는 문하부 우두머리 들을 시중으로 불렀으나 태조가 그 명칭을 정승으로 바꾸었다.
“상감마마, 좌정승 조준 대감과 우정승 김사형金士衡 대감 입시옵니다.”
지밀 상궁이 강령전 문 밖에서 아뢰었다. 그러나 아무 기척이 없다가 한참 만에 왕이 말했다.
“경들은 무슨 일이오?”

“중전 마마를 다시 뵈옵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신 등의 마음은 호천망극이옵니다. 그러나 신 등의 마음이 아무리 애절하다 하더라도 어찌 상감마마 어의에 만분의 일이나 닿겠습니까? 신 등의 심정을 필설로 이르기는 어렵사오나…….”
“알았소. 내 천천히 읽어보고 중전 앞에 보낼 테니 그 글은 두고 가시오.”
왕은 만사가 귀찮다는 듯 정승들의 말을 막아 버렸다. 조준 등이 왕에게 바친 글은 다음과 같았다.

‘전하께옵서는 하늘의 뜻과 백성들의 마음에 순응하여 새 왕조를 세웠습니다. 이것은 바로 전하의 지극하신 덕행과 어지신 심정으로 하여 하늘의 뜻과 백성들의 마음이 합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현비 전하께서도 평소에 항상 조심성이 있었고, 위급할 때에는 지혜를 발휘하시어 전하와 함께 난사를 헤쳐 나가시었습니다. 한 아내로서 지아비를 도운 공적은 역사에 빛나 이루 말하기 어렵습니다. 하늘이 무심하여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니 신 등의 슬픔은 백성들보다 몇만 배나 더 합니다.

생각하건대 신 등은 모두 변변한 자질을 갖추지 못했으나, 융성하는 때를 만나 새 왕조 창업의 공신 반열에 까지 들게 되었습니다. 의로는 임금과 신하이지만 은정은 부모와도 같으며 아무리 이 몸을 바쳐 은혜를 갚으려고 하나 이제 그 길이 안보입니다. 그런 연고로 공신 한 사람을 시켜 3년 동안 현비 전하의 능 앞에서 시묘를 하도록 하고, 차후로 이것을 규례로 만들어 대대손손 그침이 없도록 하기를 청하옵니다. 비록 끝없이 넓고 큰 은혜를 보답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할지언정 신들의 보잘것없는 성의만은 거두어주시기를 바라옵니다.’

왕은 이 글을 읽은 뒤 그대로 시행토록 했다. 뒤에 3년간 시묘살이를 한 사람은 개국 공신인 안평군 이서李舒 대사헌이었다. 이서는 부모상을 당했을 때도 6년 동안 부모상을 치른 일이 있는 효자였다.

현비가 운명한 지 8일째 되는 날, 왕이 상복에 흰관을 쓰고 나와 서운관 풍수를 맡은 관료들을 찾았다. 김용세는 윤 판사와 함께 나아가 왕을 수행했다.
왕은 먼저 유한우 지사가 보아둔 행주로 가보았다. 바다처럼 넓은 한수가 내려다보이고 진산과 좌청룡 우백호의 형상을 갖추기는 했으나 썩 좋은 자리라고 김용세는 생각지 않았다.
한참 산세를 돌아본 뒤 왕이 배상충(裵尙忠)을 보고 물었다.
“너는 이곳이 어떻다고 생각하느냐?”

갑자기 질문을 받은 배상충은 당황하여 유한우의 얼굴을 먼저 보았다.
“네 소신대로 말하라.”
왕이 다시 일렀다.
“예. 소인의 생각으로는, 썩 좋은 산으로 생각됩니다.”
몹시 떨리는 목소리로 아뢰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다음엔 김용세에게 물었다. 그는 왕이 무슨 답을 요구하는지 알고 있었다. 유 지사가 정하기는 했지만 썩 마음에 들지 않아하는 것 같았다. 유한우는 당대 제일가는 도선비기의 대가였다.
“예. 아뢰겠습니다. 소인의 생각으로는 썩 좋은 산으로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김용세는 말을 하면서 유한우와 배상충의 표정을 보았다. 하얗게 질려 있었다.
“흠, 그래? 그 이유는?”

왕은 기대했던 대답이 나온 듯 어투가 경쾌했다. 
“한성의 우백호인 인왕산과 그 연맥인 무악산의 기가 여기까지 뻗히기는 했으나 동북쪽이 얕아 조산의 지맥이 약해졌습니다.”
“전하, 그렇지 않습니다.”
유한우가 나섰으나 왕은 그 말을 가로막고 이양달(李陽達)에게 물었다.
“소인의 생각도 승 김용세와 같습니다.”

그때 더 못참겠다는 듯 유한우가 입을 열었다. 
“전하.”
그러나 왕은 더 듣지 않고 결론을 내렸다.
“기가 약하다는 말이 맞다. 지사는 딴 곳을 알아보아야 할 것이야.”
이렇게 해서 그날 행차는 소득이 없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뜻밖의 불상사가 생겼다.

귀로에 왕의 행차가 아현 고개 앞에 머물러 도성을 쌓는 축성 공사장을 잠시 둘러보았다.
전하가 마침 그곳에 나와 있는 이지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이지란은 전하가 영흥 병마사로 있을 때부터 슬하에 들어온 여진족 장수였다.
“김용세, 네가 무얼 안다고 전하께 좋으니 나쁘니 하고 입을 놀리는 게야!”
유한우가 몹시 화가 나 김용세를 보고 벼락 같은 소리를 질렀다.

“너 같은 보잘것없는 가문 출신 따위가 도선비기의 깊은 뜻을 아느냐? 네가 간룡법(看龍法)을 얼마나 안다고 주둥아릴 함부로 놀리는 게야?”
김용세는 갑자기 당한 일이라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그냥 당하고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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