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 경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칼을 들고 그 집을 나왔다.
옆에 있는 백태균의 아파트로 갔다. 죽은 배향림의 아파트는 1508호, 백 사장의 집은
건너편인 1505호였다.
만나지 못하고 16층의 강명춘의 아파트로 찾아갔다.
1609호란 조그만 명패가 붙어 있었다.

1609호라면 1509호인 조형래 아파트의 바로 위층이 되는 셈이다.
강명춘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얼떨떨한 채 소파에 앉아 강 형사의 질문을 받고 있었다.
“제발 우리 마누라한테는 제가 한 말을 하지 말아 주십시오.”
강명춘은 입술이 타는지 혀를 내밀어 침을 묻혀가면서 사정을 했다.
“아니 강 성생은 미스 배와 등산 다닌 일밖에 없다면서 뭘 그렇게 겁을 내슈?”
강 형사가 비꼬듯이 말했다.
“강 선생과 미스 배 사이는 등산 다니는 야외에서만 오르나? 방안에서도 산에는 오를 수 있어. 이건 놈담이오, 후후후.”
추 경감이 우습지도 않은데 혼자 웃으며말했다.
“허허허, 그러나 저는.......”
강명춘도 허탈하게 따라 웃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서로 껴안고 사랑을 나눌 정도면 등산이 문제겠습니까?”
추 경감이 이번엔 웃지도 않고 말했다.
“그건...... 꼭 한 번이었어요. 이 천 씨 영감 그냥 두나 봐라.”
“그뿐이 아닌 것 같더군요. 12시가 다 돼 퇴근하는 배향림 씨가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은 강 선생 아파트에 들렀다가 간다는데....... 밤 12시가 넘어 처녀가 외간 남자 집에 들러 한두 시간씩 있다가 추 경감이 다그쳤다.

“누가 그런 중상모략을 했습니까? 미스 배는 깨끗한 처녀예요.”
“글쎄 깨끗한지 어떤지는 잘 모르지만...... 수위실에는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상황을 알 수 있는 디지털 상황판이 있지요. 천 씨는 늘 배향림 씨가 밤 늦게 돌아와 어느 층에 내리는가를 유심히 보고 있었지요. 배향림이 탄 엘리베이터는 대개 15층에서 멎지만 일주일에 두 번쯤은 16층에 선다는 거였어요. 그리고 한두 시간후에 엘리베이터는 다시 움직여 15층에 와서 선다는군요. 이건 무슨 뜻일까요?”

“글쎄요. 16층에 무슨 볼일이라도 있었겠지요. 그게 꼭 나를 만나러 왔다고” 그러나 강명춘은 몹시 당황하는 것 같았다.
“이 칼 혹시 본 적 없어요?”
추 경감이 조형래 방에서 가지고 온 칼을 내보였다. 한참 살펴보던 강명춘이 입을 열었다.
“제 것 같은데요. 등산 다닐 때 가지고 다니는.......”

강명춘은 말을 끝내지 않고 거실 구석에 있는 등산 륙색을 들고 나와서 풀어 헤쳤다.
“제 건 여기 있군요.”
강명춘은 배낭 속에서 칼 한 자루를 들고 왔다. 추 경감이 들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보았다. 꼭 같았다.
“이 아파트에서 이런 칼을 가진 사람이 추 경감이 물었다.”
“잘 모르지만 우리 은파 회원은 더러 가지고 있을 겁니다.”

“강 형사, 이 칼을 감식과로 넘기게. 지문이나 혈흔 같은 걸 잘 찾아보도록.”
배향림 피살사건은 금방 풀릴 것 같았지만 실마리가 잘 풀리지 않았다.
그러던 일주일쯤 뒤에 감식과에서 결정적인 보고를 해왔다.
조형래의 침실에서 발견된 문제의 칼에서 혈흔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칼을 물에 씻었기 때문에 지문은 발견할 수 없었으나 혈액형이 AB형인 혈흔을 찾아냈다는 AB형이면 피살된 배향림의 혈액형과 같았다.

그뿐 아니라 부검을 한 검시의가 또 단서를 내놓았다.
문제의 칼로 배향림을 살해한 것 같다는 것이었다. 시체에 난 상처와 칼의 모양이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그 칼이 범행에 사용되지 않았다면 그와 똑같은 칼이 사용되었으리란 추측이 가능했다.

“조형래가 15층에 내린 배향림을 자기 아파트로 끌고 들어와 덮치려고 했지만 말을 잘 듣지 않자 찔러죽인 게 아닐까요?”
그런 뒤 시체를 엘리베이터로 옮겨다 놓았는지 모릅니다. 엘리베이터는 다른 층에서 오픈 스위치를 누르지 않으면 강 형사가 골똑히 생각에 잠긴 추 경감을 보고 말했다.
“그럼 흉기로 사용한 칼을 물에 씻은 뒤 침실에 가져다 두었단 말인가? 그런 바보 같은 범인이 어디 있겠어!”
추 경감이 나무라듯 말했다.

“그럼 백태균 사장인가 하는 녀석의 짓이 아닐까요? 파출부 경숙의 말을 들어보면 백 사장이 미스 배한테 은근히 마음이 있어 공돈도 집어 주고 값비싼 목걸이도 사다주고 했다는데요. 말을 잘 안 들었거나, 재미를 본 뒤 결혼하자는 등 책임을 지라니까 죽여 버리고 흉기를 조형래 방에 가져다 놓은 것이 아닐까요?”

“그건 말도 안 돼. 우선 칼을 조형래의 침실에 가져다 놓을 수가 없어. 현관으로 높이의 창문에 스파이더맨 같은 사람이라면 기어올라갈 수도 있겠지.”
추 경감이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경숙이라는 파출부한테 들은 이야긴데요.”
강 형사는 바보 같은 소리만 했다고 생각했던지 딴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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