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상의 명이라면 간뇌를 쏟으라해도 신자된 도리에서 마땅히 행해야 하겠으나 제 지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걱정마십시오. 예장도감 휘하의 관리 직책으로 임명을 해주실 겁니다.”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김용세는 오직 그 일 한가지만을 담당하기 위해 임명되었다가 그 일을 마치자 곧 다시 서운관으로 발령이 바뀌었다. 석감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사대석을 다 만든 뒤에 신 상궁이 직접 와서 그 중 몰래 만들어진 감실이 있는 사대석에 뭔가를 집어넣고 간 것이다. 신 상궁은 그 석감이 무엇인지 그 자체를 잊어버리라고 당부했으나 어찌 그런 것을 모를 수 있겠는가? 더구나 그 일 때문에 엉뚱한 일에 휩싸이고 말았으니.

석감을 막 만들었을 때였다. 정안군 댁의 근수(?隨) 노비 소근(小斤)이 그를 찾아왔다. 기골이 장대하여 노비만 아니었다면 장군 감일 인물이었다.
“네가 무슨 일이냐?”
소근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아무 것도 묻지 말고 사대석 안에 이것을 넣어 묻어주십시오. 나으리의 말씀입니다.”
소근은 봉서(封書) 한 통을 내밀었다. 받아쥐는 순간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부적이 틀림없었다. 무슨 목적으로 그런 것을 능에 넣으려는지야 불문가지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정안군의 뜻일까? 김용세는 불안했지만 더 물어볼 수가 없었다. 어쩌면 정안군이 아니라 부부인(府夫人) 민씨의 뜻일지도 몰랐다. 방원의 처 민씨는 이런 점술에 깊이 빠져 있었다.

가끔 김용세도 불러 점을 봐달라고도 했으나 김용세는 주역에는 그리 밝지 않아 그 부름에는 제대로 응할 수가 없었다. 김용세는 석감을 만든 사대석 안에 봉서를 넣고 흔적을 없앴다. 그 안에 또 뭔가가 들어간 것이다.

김용세는 필경 그곳에 현비가 평소 아끼던 무엇을 비밀리에 넣어주었으리라고 생각했다. 김용세는 정안군의 부름으로 빈궁에 갔을 때 시신이 있는 설빙찬궁 앞에 모셔져 있던 천축국 보물인 푸른빛 비취 불상이 생각났다. 꼭 그 크기의 감실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무엇을 넣었는지는 아무도 확인해 주지 않았다.

애도와 긴장과 유언비어 속에 현비가 승하한 지 여섯 달이 흘러 새해가 되었다. 주상이 왕위에 오른 지 여섯 번째 해가 밝은 것이다. 그 해 정월 초사흗날 신덕 왕비의 장례가 있었다.

이미 상당히 축조가 된 정릉에 신덕 왕비의 관이 묻혔다. 이 날의 장례는 왕도 끝까지 지켜보았으며 현비의 재궁(梓宮)(시신을 넣은 관)이 아홉 자가 넘는 석실 현궁(玄宮)(관이 들어가게 파놓은 땅)으로 하관될 때는 소리없이 눈시울을 붉혔다. 조포사인 홍천사도 터를 다 닦은 위에 뼈대가 서 있었다. 그 우람하고 넓은 규모는 경복궁 이후 최대의 역사처럼 보였다.

이날 재궁과 지석을 묻은 땅 속에는 지문석(誌文石), 명기(明器), 책보(冊寶) 이외에 특별한 무엇인가 함께 묻힌다는 것은 김용세만 아는 사실이었다. 왕과 정안군이 각기 무엇을 묻었으니 그것 모두를 아는 이는 김용세 뿐이었다. 책보란 <옥책>과 <금보>를 줄여서 한 말로 옥책은 왕비의 존호를 올리는 글인데, 남양에서 나는 청옥을 사용했다. 또한 금보는 존호를 새긴 도장이다. 옥책의 크기는 길이가 9척 7푼이고 두께는 1치 2푼으로 매우 컸다.

왕은 흥천사의 동쪽에 5층 사리탑을 짓게 하고 거기에 회암사에서 보관하고 있는 통도사의 석가여래 진신사리를 가져다 모시도록 명했다. 그 외에도 다른 절에 있는 상당한 보물들을 그곳으로 옮기도록 지시했다.
정릉과 흥천사 공사는 근 일년에 걸려 끝났다. 왕은 흥천사에 당대 고승 상총尙聰을 머물게 하고 신덕왕후의 능을 극진히 호위토록 했다.
흥천사에는 107명의 승려가 머물렀다. 그 밖에도 시묘하는 이서 대감과 참봉, 호군 등 많은 관원과 백 명의 시위군을 상주하게 했다.

빈궁이 있던 곳에 다시 혼궁(魂宮)이 설치되었다. 왕은 사흘이 멀다 하고 정릉에 행차했다. 그뿐 아니라 틈만 나면 광화문 누에 올라가 정릉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곤 했다. 광화문 누에서는 정릉이 아주 잘 보일 뿐만 아니라 흥천사에서 재 올릴 때 치는 종소리도 선명하게 들렸다.
왕은 흥천사에서 현비에게 재 올리는 종소리를 듣고 난 후에야 마음 놓고 수라를 들었다고 신 상궁이 김용세에게 이야기했다.

왕의 현비에 대한 애정은 식을 줄을 몰랐다. 왕이 왜 현비의 능을 도성 내에, 그것도 취현방 언덕에 쓰고자 했는지 그제야 궁내 사람들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정안군을 비롯한 대군들은 왕의 현비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나약함을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2. 싹트는 모반

신덕왕후가 귀천하신 후 태상왕 전하는 정사를 돌보지 않으시니 간신잡배와 작은 이익을 쫓는 소인배들이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고 날뛰게 되었도다. - <무인록> 

현비가 죽은 후 왕은 거의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근정전에서 조회가 열려 정승들과 중추원 판사, 삼사 판사, 예조, 호조 등의 책임자들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아랑곳 않고 취현방의 정릉에 가서 흥천사의 공사장이나 돌아보곤 했다. 그때엔 대개 내시 김사행과 조순이 수행을 했는데, 그들은 고려 왕조 때부터의 내시들로 왕을 바로 보필하지 못한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그러나 봉화백 정도전의 비호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정면에서 그들을 나무라지는 못했다. 특히 김사행은 왕을 수행하면서 흥천사 공사에 건의를 많이 했는데, 그 내용은 절을 너무 호화롭게 짓도록 한다 하여 도당에서 공론이 좋지 않았다.
왕은 거의 이틀이 멀다 하고 정릉에 행차했으며 그렇지 않을 때는 궁내 여러 관아를 순시했다. 정사를 보기 위해 순시하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을 잊기 위한 산책 같았다.

왕의 일상을 지켜 본 사람들은 아내를 그리워하는 한 지아비의 뼈에 사무치는 그리움을 함께 느끼며 슬퍼했다. 어느 날 왕을 기다리던 당상관들이 모두 나가고 난 뒤 텅 빈 근정전에 들어선 왕이 사방을 한참 둘러보다가 수행한 내시 김사행에게 물었다.
“여기 몇 사람이나 들어앉을 것 같나?”
김사행은 무슨 뜻으로 묻는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한 팔십여 명 들어오기는 넉넉할 것 같습니다.”

“그럼 됐어. 중추원에 일러서 회암사 스님 팔십 명을 불러다 내일부터 현비의 명복을 비는 법회를 열라고 해라. 경전은 평소 현비가 즐겨 봉독하던 금강경을 읽도록 하고.”
그때서야 김사행은 왕의 의중을 헤아렸다.
“예, 마마. 곧 봉상시에 일러 분부 거행토록 하겠사옵니다. 독경 시일은 내일부터 이레를 잡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이 중추원에 이르라고 했는데, 김사행이 제 멋대로 봉상시에 이르겠다고 한 것은 그러한 제사 추모 업무가 봉상시의 주 업무이기 때문이었다.
중추원을 밀직사라고도 하였는데, 그 이유는 고려 왕조의 금위, 승정원 일을 밀직사에서 행했고, 개국 초기에는 밀직사로 불렸기 때문이다.

개국을 하고 이태까지는 나라 이름도 왕씨 조정과 마찬가지로 <고려>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태 뒤에 명나라 황제가 <조선>을 국호로 쓰도록 한 뒤에야 바꿔 불렀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시중을 정승으로, 예부, 호부 등을 예조, 호조로 바꿨으나 대신들도 섞어서 부르고 있었다.

왕은 정사를 거의 돌보지 않을 뿐 아니라 사람을 만나는 것도 극히 제한하고 있었다. 봉화백 정도전, 세자, 장군 시절의 수하였던 여진족 이지란, 한양 부사 성석린, 현비 소생의 경순궁주(敬順宮主) 남편인 이제(李濟) 등이 왕이 주로 만나는 사람들이었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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