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세가 얼른 일어나 인사를 올리자 방원은 인사치레는 그만두라는 듯 어서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단도직입으로 묻겠네. 솔직하게 말해 보게.”
방원의 태도에 김용세는 절로 긴장이 되었다.
“이번 묘를 쓰게 되어 무슨 변화가 생길 지 말해 보게. 아까는 세자가 있어 내 거기까지 묻지 못했네.”

묘를 쓰는 이유는 망자의 편안을 바라는 것이 그 하나요, 자손의 발복을 바라는 것이 그 둘이었다. 따라서 길지에 장사를 지내면 복을 받지만 흉지에 장사를 지내면 화를 받게 되는 것이다. 방원이 묻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이는 왕실의 안위와 관련이 되는 일이니 함부로 발설했다가는 삼대가 멸족될 이야기였다. 김용세는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키고 말았다.
“아무 걱정 말게. 이 방에서 하는 말은 천지간 어디에도 새어나가지 않을 테니. 물론 자네 뒤는 내가 평생 보장할 것이네.”

그래도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허허, 이 사람. 그렇게 배포가 작았던가? 훗날 자네가 원하는 것은 내 무엇이건 한 가지 들어줄 터이니 이제 그만 입 좀 떼 보게.”
“아, 아닙니다. 그저 생각을 좀 해 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래. 그 생각의 결과가 뭔가?”
“절지(絶地)입니다.”

절지라 함은 후손이 끊기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래? 또?”
“명당이라 해도 발복에는 시간이 걸립니다만 흉당의 경우는 화가 일찍 미치는 법입니다. 결코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없는 자리입니다.”
굳어있던 방원의 미간이 미미하게 풀리는 것 같았다. 방원의 입끝도 슬며시 올라간 것 같았다. 방원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렇군. 그랬어. 그렇다면 그 묘를 쓴 것은 외려 잘 된 일이 아닌가?”
김용세는 그 말은 못 들은 척 머리만 조아렸다. 방원의 뜻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분명해졌다. 갑자기 숙인 목덜미에 소름이 돋는 것만 같았다. 다행히 방원은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김용세가 그 방에서 나오자 팔월의 긴 하루가 끝나 땅거미가 지고 인왕산 위에 걸린 노을도 거의 시들어가고 있었다.

김용세가 총총걸음으로 빈궁을 나설 때 상복을 입은 한 여인이 다소곳이 목례를 했다. 키가 크로 목이 긴 것으로 미루어 틀림없는 지밀 상궁 신씨였다. 김용세는 그녀의 자태를 보자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현비가 죽은 지금 현비의 그림자와 같았던 그녀의 심경이 어떠할지 애처롭게 느껴졌다. 그녀의 눈빛이 어쩐지 그의 가슴에 무엇인가를 호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빈소에 있던 비취 불상의 평온한 모습에 비해 슬픔과 하소연으로 가득 찬 신 상궁의 눈빛이 참으로 대조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능터를 잡고 산역이 시작된 후부터 조금 누그러진 듯하던 왕의 태도는 다시 걷잡을 수 없는 불안한 상태가 되어 밀직사를 비롯한 모든 관속이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은 이틀이 멀다 하고 취현방으로 나가 산역 작업을 돌아보았다.
날카로워진 왕의 심경은 마침내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김용세가 뒤에 들은 전말은 다음과 같았다.

봉상시에서 현비의 존호(尊號)를 지어 올렸는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시호는 봉상시의 박사들이 안을 만든 뒤 예조로 보내고 예조에서 검토한 뒤 다시 문하부로 보내진다. 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곳은 문하부이다. 현비의 존호는 <효소, 소순, 소헌> 중에서 왕이 최종 결정을 하도록 했다. 그러나 왕은 존호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고 엉뚱하게도 봉상시에서 올려진 정희계(鄭熙啓)의 시호가 좋지 않다고 불호령을 내렸다.
정희계는 원래 최영 장군 휘하에 있던 고려의 문관이었으나 왕을 도와 창업을 한 뒤 일등 공신이 되고 죽을 때는 판한성부사로 있었다.

“계림군은 개국 공신이고 문하부 상장군에 개성부 판사를 지낸 이 나라의 기둥이었는데 이 따위 돼먹지 않은 시호를 내리란 말인가? 누가 이런 졸렬한 안을 내었는지 잘 알아보아라.”
참으로 터무니없는 트집이었다. 그러나 삼봉 정도전은 그것이 단순한 왕의 생투정만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현비가 죽은 이후 한씨 신의왕후 소생 대군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데 있다고 생각했다.

장차 어린 세자 방석이 왕위를 무사히 이어받을지 모르겠다는 불안함을 왕은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존호 사건으로 진노한 직접적인 이유는 현비의 존호 시안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그것을 직접 이야기하지 않고 정희계의 시호를 들어 진노했던 것이다.
“전하, 계림군의 시호를 허술하게 지은 것은 그가 전조의 벼슬을 했다는 허물만 보고 새 왕조의 공을 무시한 좁은 소견에서 나온 것으로 압니다. 즉시 봉상시 박사 최견(崔?)을 순군 옥에 가두고 문초하도록 형조에 이르겠습니다. 그리고 중전마마의 존호도 다시 짓도록 이르겠습니다.”

정도전의 이 말은 왕의 명을 듣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결정을 통고하는 것과 같은 형식이었다. 그의 권세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 일로 봉상시에는 줄초상이 났다. 직접 정희계의 시호를 만든 박사 최견뿐 아니라 소경(少卿) 안성(安省), 승丞 김분(金汾), 협률랑(協律郞) 민심언(閔審言), 녹사(錄事) 이사징(李士澄) 등도 순군분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뿐 아니었다. 형조(刑曹)에서 잘못 정해진 시호의 안을 검토하지 않고 그대로 넘긴 예조 의랑 맹사성孟思誠, 좌랑 조사수(趙士秀) 등도 규탄하고 나섰다. 문초를 끝낸 형조에서는 최견에게 교형을, 안성과 김분 등에게는 곤장 백대에 도형 3년의 중형을 요구했다.
그러나 좌정승 조준은,

“그들의 죄가 왜 이렇게 무거운가?”
하고 재검토를 했다. 그는 삼사 판사 설장수와 함꼐 정도전이 작년에 윤색해서 간행한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에 비추어 보았다. 거기에 비추어도 목숨을 뺏는 일은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되었다. 조준은 서적원에서 대명률직해 두 권을 가져오게 하고 해당되는 조문을 펼쳐든 채 전하에게 가져가 보이고 어명을 기다렸다.

왕은 조준의 의견을 받아들여 최견을 형장 백 대를 쳐서 김해로 도형을 보내고, 봉상시의 다른 죄인들은 형장 없이 도형만 보냈다. 또한 맹사성, 조사수 등 예조 죄인들은 파직을 시킴으로써 그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맹사성은 뒤에 문명을 날린 고불대감 문정공을 이름이다.
봉상시에서는 그 뒤 다시 현비의 존호를 신덕(神德)왕후로, 능을 정릉(貞陵)으로 올려 왕이 흡족하게 생각하고 그대로 결정되었다.

김용세의 집은 남문 밖 한강 큰 나루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원래 도성 안 남부 예성방(禮成坊)에 본가가 있었지만 김용세가 과전으로 받은 전답이 남문 밖에 있기 때문에 그쪽으로 가서 늙은 홀어머니와 살고 있었다. 어머니와 집안 어른들이 재혼을 재촉했으나 김용세는 2년째 그 권유를 사양하고 있었다.
자식 하나도 안 남겨놓고 저세상으로 떠난 처 동의에 대한 그리움이 날이 갈수록 생생한 그의 심정을 어머니도 몰라주었다.

어느 날 그가 퇴청하느라 남문을 막 나설 때였다. 목멱산(남산) 서쪽에서 한강에 이르는 평지에 말을 타고 활을 멘 병졸들과 전복을 입고 창기를 든 갑병들이 훈련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규모가 대단히 크고 평소에 볼 수 없던 일인지라 김용세는 걸음을 멈추고 바위에 걸터앉아 그 모습을 구경했다.

국상 중이기 때문에 평상시에 하던 일도 번거로운 것은 삼가고 있는데, 병졸을 일으켜 도성 정문인 남문 앞에서 군진을 펼치다시피 한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병졸들은 그 차림새나 영기, 전복의 색깔로 보아 한장군 휘하의 병졸만이 아닌 것 같았다. 서너 패가 합친 것 같기도 하고 따로따로 훈련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저게 누구의 군사들입니까?”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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