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들은 모두가 정도전의 주변 인물이었고, 정도전의 가장 강력한 반대 세력인 정안군 방원의 측근들은 모두 소외되어 왕을 만나기 어렵게 되었다.

정안군 방원과 현비의 암투는 그 뿌리를 캐보면 개국 초 경처(京妻)에 불과한 강씨가 정식 왕비로 된 때부터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들이 첫 번째 충돌을 한 것은 물론 왕세자를 책봉할 때였다.

현비는 자기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왕이 먼저 세상을   하직할 경우 자신과 두 아들, 즉 방번과 방석 그리고 딸 경순궁주의 운명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처인 한씨 소생의 다섯 아들과 두 딸의 시샘으로부터 살아남는 방법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중전 마마께서는 처음에 무안군 방번 나으리를 세자로 천거했지요. 그러나 정하께서 봉화백 대감과 상의한 끝에 방석을 세자로 결정했습니다. 그때 전하께서는 무안군은 성정이 너무 물러 국가 창업을 이어가기가 벅찰 테니 차라리 물러나 있는 게 좋을 것이라고 중전 마마께 말씀하시는 것을 제가 들었습니다.”
어느 날 오후 누국으로 찾아온 신홍아 상궁의 말이었다.
“대낮인데 어떻게 이렇게 나올 수가 있었소?”

아직도 흰 상복 차림의 신 상궁을 보고 물었다.
“지금은 번을 서는 차례가 아닙니다. 우리 내인들은 원래 번이라는 것이 없이 하루 종일 마마께 매여 있었으나 내시부 이득분 판사 마마님꼐서 모든 내인에게 번을 정했습니다.

상궁, 항아, 무수리를 각각 구분해서 오후 정신시(正申時)에 번을 바꾸도록 했습니다. 소주방과 세수간 내인들은 신시가 아니고 미시입니다만…….”
소주방(燒廚房)이란 궁정의 음식을 맡은 부서를 말함이요, 세수간(洗水間)이란 전하의 세수, 측간일 즉 매우梅雨 틀을 맡은 부서를 말한다.
“고달픔이 좀 덜하겠구려.”
상궁들의 일을 옆에서 보아 잘 아는 김용세가 웃으며 말했다.
“그 일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신 상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요?”
김용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중전 마마의 대상이 끝나면 저는 궁 밖으로 내쳐집니다. 원래 모시던 상전이 세상을 떠나면 소속 상궁들은 풀려나서 궁에 남아 있지 못하게 된답니다.”

“그럼 어디로 가게 되나요?”
“전하께서 특별히 취현방 정릉 가까운 곳에 소녀가 살 여염집을 마련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현비 마마를 가까이서 뫼시게 된 셈이지요.”
“정릉에는 이서 대감이 시묘를 살고 군졸이 백 명이나 시위(侍衛)하고 있지 않습니까?”

김용세는 신 상궁의 처지가 딱한 것 같아 걱정해 주었다. 그러나 현비와는 생사를 같이 할 정도로 생시에 가깝게 지낸 신 상궁이기 때문에 있을 법한 일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신 상궁은 중전 마마가 하신 일은 모두 알고 있었을 텐데……. 중전 마마께서 봉화백을 너무 가까이 하기 때문에 망측한 소문 같은 건 없었나요?”
김용세는 현비 이야기가 나온 김에 평소 물어보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철없는 생각시들이 그런 소리를 하더군요. 그러나 상감마마나 중전마마 두분 모두 서로 얼마나 아끼셨는데요. 덕분에 중간의 저희들이나 고생을 하는 거였지만…….”
“네? 고생을 하시다니요?”
“어머, 쓸데없는 소리를 했군요.”

신 상궁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런 모습이 고혹적이라 김용세는 저도 모르게 목젖을 울리고 말았다. 그 뒤 신상궁은 왕이 한씨 신의 왕비의 다섯 아들들을 다 제쳐놓고 열네 살의 어린 막내를 왕세자로 삼은 일은 왕이 현비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를 증명하고도 남는 일이라는 말을 늘어놓다가 자리를 떴다. 그럴만도 한 일이었다. 한씨의 다섯 아들 중 넷째인 방간과 다섯째 방원은 오늘의 왕조를 있게 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아들들이 아닌가? 특히 정안군 방원은 인물이 군자답고 통이 크며 담력이 뛰어난 무장으로서 난세를 헤쳐 나가는 데는 나무랄 데 없는 군왕감이라고 왕 자신도 생각하고 있는 터였다.

방원이 동북면 시절 갑주에 준마 차림으로 북원을 달릴 때는 장비와 같았고, 형제들과 난제를 의논할 때는 그 인품이 유현덕과 같다고 이지란도 칭찬했었다.

그는 아버지를 지존의 자리에 올리기 위해 장사 조영규를 시켜 당대의 명신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철퇴로 죽이는 일까지 서슴지 않고 해치우지 않았던가?
또한 넷째 왕자 회안군 방간도 야심 있는 대군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형들을 다 제치고 막내를 후계자로 삼은 것은 왕의 결심을 웅변해 주는 일이었다.

방원의 입장에서 보면 가슴에 지울 수 없는 못을 박은 현비 강씨를 어찌 꿈엔들 잊을 수 있겠는가.
“정안 대군과 중전 마마의 반목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요. 더구나 봉화백 대감을 비롯해 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 대감, 중전 마마의 친정 아버님인 심 부원군 나리 등 모두 현비의 편에 섰으니…….”

현비와 정안군의 싸움은 현비가 없는 지금부터 더욱 불이 붙을 것 같은 불안감이 김용세의 마음 한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왕이 정사를 놓다시피 하자 조정과 민가 여러 곳에서 기강이 해이해지고 변괴까지 잇달았다.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지자 권력의 행방에 대한 억측이 난무했다. 그 초점은 역시 세자의 옹호 세력인 정도전과 정안군의 대립에 관한 것이었다.
왕이 현비의 허상을 쫓고 있는 사이 변괴는 하늘에서부터 일어났다.

대낮에 태백성이 나타나는 일이 자았다. 또한 서운관에 보고된 것으로는 영평, 백운산에 핏빛 비가 한나절이나 내렸다는 것이었다. 또한 바다가 사흘 동안 핏빛으로 변했다는 보고도 있었다.
윤신달 판사의 보고를 받은 왕은 크게 걱정했다.
“이는 필시 신덕 왕비에 대한 정성이 부족해서 생긴 일이다. 열성조에게 정성을 바치고 신덕 왕비의 영혼을 더욱 위무해야 한다.”

왕은 영성군(寧城君) 오사충(吳思忠)을 시켜 큰 제를 올리도록 했다. 그러나 재앙은 그치지 않았다. 김용세는 서운관 주부 김서로부터 월식이 있을 것이란 보고를 받고 승정원과 도당에 알렸다. 모두 흉조가 아닐까 걱정을 했다. 그러나 월식이 일어나지 않자 김서가 홍역을 치렀다.

조회는 아예 폐지하고 거의 매일 정릉과 궁내 순시하던 왕이 갑자기 병이 나 자리에 눕게 되었다.
전의사(典醫寺)를 시켜 전의들을 급히 연생전으로 불렀다. 연생전은 원래 현비의 침소였으나 왕은 주로 경성전을 사용했기 때문에 잘 쓰지 않는 곳이었다.

전의들은 궁 안의 내의원과 궁 밖의 외의원에 있었는데, 전하가 병환이라는 급보를 받고도 제때에 입시하지 못하는 일이 생겼다. 이 일로 인하여 전의 네 명이 귀양을 갔다. 오 경우(吳慶祐)는 청해로, 김지연金之衍은 옹진으로, 장익(張翼)은 영해로, 그리고 내의원의 양홍달(楊弘達)은 축산으로 귀양을 보냈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당대의 명의였던 양홍달은 귀양에서 풀려 한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노비가 도망가는가 하면 정도 후 몇 년째 계속되고 있는 한양 도성 공사에서도 사고가 잇달았다.
정안군 방원과 같은 입장에 있으면서도 기회만 있으면 권력을 휘어잡으려는 야심가 회안군 방간이 데리고 있는 노비들이 일을 저질렀다.

영안군 사저에서 일하는 노비 석구지(石仇知)가 예조 주부 이향 집에 찾아가 행패를 부린 사건이 정도전에게 보고되었다. 석구지는 그 집에 있는 인물이 반반한 여종에게 흑심을 품고 있다가 뛰어들어가 그 여종을 내놓으라고 생떼를 썼다.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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