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상시의 박사들과 서운관 관원들이 다시 능터를 잡기 위해 양주 모악 등의 산을 헤맸다. 여러 후보지 중에 윤신달 판사가 천거한 조산(朝山 관악)을 가장 좋은 후보지로 뽑고 왕이 직접 보기 위해 어가의 행차가 다시 이루어졌다.

그러나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광화문을 나서 광통교를 건너 남문으로 향하던 전하가 돌연 어가를 멈추게 했다. 그리고 수행하던 좌승지 정탁을 보고 물었다.
“저기 오른쪽 조그만 언덕이 있는 곳이 보이느냐? 거기가 어디냐?”
“예, 그곳은 한양 성내 서부 취현방이란 곳입니다. 넘어가면 서문이 보입니다.”
정탁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태도로 설명했다.
“그곳으로 가자.”

그래서 어가는 취현방 언덕 아래에 멎었다.
전하가 산이라고는 할 수 없는 둔덕 위에 올라가 목멱산(木覓山)을 한참 바라보다가 윤신달 판사와 봉상시 박사들을 불렀다. 그리고는 뜻밖의 질문을 했다.
“저곳이 묘 자리로 어떠냐?”

모두 어안이 벙벙하여 말을 못하고 있었다. 우선 그곳은 도성 안이기 때문에 묘를 쓸 수 없는 곳이다. 신분이 왕비이기 때문에 백보를 양보해 할 수 있다고 보더라도 풍수지리상으로는 도저히 능을 쓸 수 없는 위치이다. 또 그곳은 산이 아니므로 <산법전서> 에서 말하는 사법(四法)에도, 음양설의 사상(四相)에도 맞지 않는 곳이었다.
난감한 표정을 하고 있는 윤신달 판사의 등 뒤에서 김용세가 나직하게 말했다.
“소신대로 부끄럼 없는 대답을 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전번에 곤욕을 치러 본 적이 있는 윤 판사는 전하의 뜻을 빨리 읽은 듯했다.
“썩 좋은 자리인 줄로 아룁니다. 저곳은 새로이 지리를 따져볼 이유가 없는 곳입니다. 상감마마께옵서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시고 정도 정궁을 하실 때 이미 천하의 간룡법 대가들이 모두 예언한 명당 아닙니까? 고로 저곳은 양택 유택을 가릴 것 없이 도성 전체의 일부이니 길지임에 틀림없습니다.”

도성이 길지니 능을 써도 길지라는 윤신달의 주장은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이긴 했지만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을 능터로 정한다. 산림도감에서는 지체하지 말고 일을 진행시켜라.”

이렇게 해서 현비의 능은 도성 안에 쓰이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대군이나 공신들은 처음에 크게 놀랐으나 전하의 의지가 워낙 강력한지라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왕이 현비의 능을 그곳에 쓴 이유를 한참 뒤에야 사람들은 알 수 있었다. 비록 현비는 죽었지만 그녀를 곁에 두고 싶은 안타까움이 이렇게 나타난 것이다.
능터가 정해지자 왕은 그 동안 중지되었던 저자를 다시 열게 하고 조회에도 나왔다. 열흘 만의 일이었다.
그날 저녁 무렵 김용세가 막 퇴청하려고 나설 때였다. 중궁전 별감 소속의 갑사 한 사람이 전갈을 가지고 왔다.

“정안군 나으리께서 뫼셔 오라는 분부입니다.”
“정안군 나으리께서? 지금 어디 계시냐?”
뜻밖의 분부에 적이 놀라 되물었다.
“빈궁에 계시옵니다.”
“빈궁으로?”
“예.”
그것은 더욱 뜻밖의 일이었다. 옛 궁에 설치되어 있는 중전의 빈소는 시위가 엄중할 뿐 아니라 종5품 당하관인 자기가 갈 곳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더 시비를 걸 일이 아니기 때문에 빈궁으로 급히 올라갔다. 상복을 입은 궁주들과 상궁들이 방금 상식을 올린 듯 나오고 있었다.

네 궁주 중 현비 소생인 경순궁주는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부어 있었다. 궁주들은 흰 저포 상복 위에 소매와 섶이 없는 흰 배자를 입고 허리에는 역시 흰색 대(帶)를 두르고 있었다. 백두 서민의 아내들이 입는 몽두의(蒙頭衣)와 비슷한 옷이었다.
김용세는 빈청으로 안내되었다. 대수(大袖) 상복에 굴건을 쓴 대군들이 한 줄로 앉아 있었다. 세자 저하가 맨 앞에 있었다. 김용세는 너무 황공해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무릎을 꾼 채 머리를 조아렸다.

“소인, 서운관 승 김용세 대령이옵니다.”
“음, 왔구먼. 고개를 들라. 우리가 긴히 들을 이야기가 좀 있어서 이리 오라고 했네. 세자 저하께서도 듣고 싶어 하실 것이고…….”
정안군 방원이 일곱 형제를 돌아보며 말헀다.
“송구하옵니다.”

김용세는 자기가 왜 송구스러운지 알 수 없으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정안군의 말투에서 누구에겐가 시비를 걸어야겠다는 노기 같은 것을 느꼈다. 그것은 어쩌면 현비의 막내왕자인 세자 방석을 향한 것 같아, 막연한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오늘 취현방을 능터로 정한 경위를 듣고자 하네. 나보다 세자 저하를 위해서라네.”
“나야 뭐…….”

세자는 아주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우리도 좀 듣고 싶소. 정안군, 왜 세자 말씀만 자꾸 하시는가?”
목소리가 거친 넷째 회안군(懷安君) 방간(芳幹)의 말이었다. 세자에게 저하라는 존칭도 쓰지 않았다. 김용세는 공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더구나 유택의 택지에 관해서는 전하가 직접 한 일이 아닌가. 여기서 말을 잘못했다간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어명이 계신 일인 줄 압니다만.”
김용세가 고개를 들어 정안군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고 세자는 여전히 불안한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알고 있네. 하지만 자네는 이 나라에서 가장 깊이있는 장풍법(臧風法)을 공부한 사람 아닌가? 그러니 취현방의 유택(幽宅)을 좀 설명해 주게.”

장풍법이란 명당을 가려내는 법을 이름이다. 김용세는 정안군이 여러 형제 앞에서 김용세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상감이 저지를 터무니없는 일을 규탄하고자 하는 것이 틀림없다. 김용세는 이런 경우 잔꾀를 부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낮에 왕이 윤신달 판사에게 의견을 물었을 때 자기가 한 말이 생각났다. 윤 판사는 그때 소신대로 말하지 않았다. 김용세는 비장한 각오를 했다.

“소인을 과찬해 주셨습니다. 그 유택에 대해 옛 책에 나와 있는 대로 아뢰겠습니다. <설심부>(雪心賦)에 이르기를 용(龍)의 행지行止에 지처(止處)를 진혈(眞穴)이라 하였습니다. 지처란 용, 즉 산의 연봉이 그 호름을 다한 곳을 의미합니다. 태조산으로부터 받아온 기氣가 조산 또는 분벽(分碧)을 거쳐 주산에 이르고 그 주산 기슭에 명당이 있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취현방 북쪽의 산은 연봉에 연결된 것이 아니고 평지 중에 혼자 돌출한 모습입니다. 따라서 용의 기를 받을 맥이 없습니다. 또한 앞에 있는 안산 격인 목멱산과 조산 격인 관악은 주산보다 낮아야 하는데 주산인 취현방 언덕보다 훨씬 높은 산입니다.”

김용세의 설명에 세자와 무안군(撫安君) 방번은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정안군은 아무 표정 없이 눈을 감은 채 다시 말했다.
“그럼 왜 전하께 그 말씀을 드리지 않았나?”
“소인에게는 하문하신 일이 없었기 때문이옵니다. 그러나 도선비기나 다른 도참서에도 있지만 한양 도성 전체가 강산 제일의 길지이기 때문에 이러한 간룡법은 모두 묻어 버릴 수가 있습니다.”

김용세는 이마의 땀을 훔쳐냈다. 등골에도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왔다. 이제 왕자들의 처분만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수고하였네. 알았으니 그만 가보시게.”
정안군의 이 말은 지옥에서 그를 건져주듯이 반가웠다. 김용세는 거기서 아물거리다가 또 무슨 낭패를 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빨리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모퉁이를 돌자 예의 그 갑사가 지키고 있다가 말을 걸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정안군께서 따로 하문할 것이 있으십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갑사는 김용세를 빈 방으로 안내했다. 잠시 후에 방원이 들어섰다.
“찾아 계시옵니까?”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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