갸름한 얼굴에 뾰족한 턱이 그녀를 약간 날카롭게 보이게 하기는 했으나 상당한 미인 축에 드는 여자라고 곽 경감은 생각했다.
“아이 경감님도 뭘 그렇게 들여다보세요?” 
“예? 제, 제가요...” 

곽 경감은 당황해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근데 어떻게 그렇게 변장을 할 수가 있었나요?”
“아까 화장실에 가서 다 지워 버렸지요.” 
여자의 목소리도 완전히 달라졌다. 사투리를 쓰는 중늙은이가 아니라 발랄한 젊은이였다.

“우리 보고서는 각각 쓰기로 되어 있지만 오늘 여기서 헤어진 두에도 모른 척 하기는 없기예요?” 
여자가 아이스커피 한잔을 단숨에 마신 뒤 한 말이었다.
                   
<35> 검은 샘 공격하기

곽 경감은 사무실로 돌아와 거기서 관찰한 일들을 자세하게 보고서로 꾸몄다.
그는 보고서를 쓰다가 문득 승무원복을 입고 다니던 한 여자의 얼굴을 떠 올렸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영 생각이 나지 않아 그냥 넘어갔던 여자였다.
“맞아. 그 여자다!” 

곽 경감이 혼자 고함을 질렀다.
“그 여자가 왜 거기에 나타났을까?” 
곽 경감이 그 여자라고 한 것은 얼마 전 그가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납치되어 페닌슐라 호텔에서 심문을 받고 있을 때 피씨 자판을 두들기던 여자라는 것을 기억해 낸 것이다. 나봉주. 피살된 조은희의 남동생 조준철의 애인이기도 한 그 정체불명의 여자가 이번에는 유람선의 승무원으로 둔갑하고 나타난 것이다. 곽 경감은 그 여자가 승무원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어느 쪽 정보기관의 요원으로 유람선에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곽 경감의 추리는 맞았다. 유람선 회사에는 그런 승무원이 없었다.
곽 경감이 한강 유람선 위에서 세 번째 만난 여자, 나봉주의 정체는 무엇일까? 오뚝한 콧날과 계란형으로 생긴 갸름한 얼굴이 그녀를 미인으로 보이게 했을 뿐 아니라 날카롭게 보이게도 했다. 호리호리한 몸매 그리고 긴 하체가 퍽 육감적이었다. 얼굴은 도대체 몇 살인지 알기 어려운 묘한데 가 있었다. 

어떻게 보면 나이가 상당히 든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아주 앳되어 보이기도 했다. 곽 경감이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조준철의 애인으로서 였다. 그러나 두 번째 만난 것은 가해자로서 였다.

그렇다면 이 여자가 조은하의 피살 사건, 곽 경감의 납치사건, 그리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국무위원 부인 납치사건과 모두 관계가 있다는 얘기가 되고, 이 세 가지의 사건은 어떤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문제의 여인 나봉주는 그때도 조준철과 만나고 있었다.

조준철이 그 여자를 처음 만난 것은 병원에서였다. 정형외과에서 레지던트 2연차 일을 보고 있는 그는 가끔 의사 노릇을 할 때가 있었다.
그 날 밤도 당번인 그가 외래에서 진찰하는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밤 열 한시가 훨씬 넘어서였을까?

“조 선생님 응급 환자인데요.” 
간호사가 다급한 목소리로 여자 환자 한 사람을 부축하고 들어왔다. 팔을 다친 듯 손수건으로 싸매고 들어오는 여자의 고통스러운 얼굴을 처음 보는 순간 조준철은 이상하게도 가슴이 감전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여자의 얼굴이 어쩐지 낯선 사람 같지 않았을 뿐 아니라 빨리 저 여자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이리로 눕혀요.” 
조준철은 여자를 진찰대에 눕히고 상처 난 팔을 보았다. 왼쪽 팔에 골절이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하다가 다치셨어요?” 
그는 여자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일생에 처음 만나는 미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골목에서 치한한테 당했어요.” 

여자가 약간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당해요? 아니 그러면...” 
조준철은 그렇게 말해 놓고는 엉뚱한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 곧 얼굴이 붉어졌다. 순간 여자가 아랫도리를 감싸면 억센 남자의 입술을 피하는 상상을 했다. 아니 남자의 엄청난 흉기가 여자의 속살을 공격하려는 모습이 얼핏 지나갔다.
“미, 미안합니다...그런 뜻이 아니고...” 

조준철이 당황해하자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 뜻이라뇨? 내가 성폭행이라도 당한 것 같아요? 그런 일 당하지 않으려고 이렇게 팔을 부러뜨린 거랍니다.” 
여자가 또 웃었다. 웃을 때마다 조준철은 가슴에 고압 전류가 흐르는 것 같은 이상한 충격을 받았다.

그날 밤 이후 조준철은 나봉주의 포로가 되었다. 그들은 급속도로 가까워져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 몸을 섞었다.
“아파요. 좀 쉬었다가...”

여자가 고통을 느낄 때 까지 하루 밤에 서너 번씩 몸을 요구할 정도로 조준철은 여자의 몸에 집착했다.
근 일 년을 사귀면서도 나봉주는 자기의 가족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자기의 과거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여자에 대해 조준철이 알고 있는 것은 극히 일부이고 피상적인 것들이었다.

예를 들면 카프카 같은 어려운 책을 줄줄 외우다시피 좋아한다든지, 살아있는 낙지를 입안에 넣고 우물우물 먹으면서 즐긴다든지, 섹스를 할 때는 소리를 지나치게 질러대거나 틈틈이 계속 군것질을 해야 한다든지 하는 따위였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조준철에게 감추고 있는 것이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곽 경감이 페닌슐라 호텔에서 그 여자를 본뒤 조준철에게 귀띰을 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여자는 그런 일은 전혀 모른다고 딱 잡아떼었다. 그 일은 곽 경감이 잘못 보았는지도 모른다고 조준철은 생각했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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