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화> 여자의 손이 갑자기

곽 경감은 아무래도 위층보다는 아래층에 문제의 인물들이 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밑으로 내려왔다.
“우리 제일 뒤에 가서 앉아요.” 
여자가 곽 경감 곁에 딱 붙어 서서 팔짱을 끼며 말했다. 곽 경감은 너무 밀착해 온다고 생각하자 공연히 얼굴이 붉어졌다. 집에 있는 마누라 얼굴이 떠올랐다.

두 사람은 아래층 제일 끝 좌석에 앉았다.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거의 전부 시야에 들어왔다. 곽 경감은 중간쯤에 앉아있는 신 대령을 보았다.
그는 흰색에 검은 칼라가 있는 점퍼 차림이었다. 그의 옆에는 머리를 짧게 깎고 다부져 보이는 40대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곽 경감은 그가 정부 측의 고위층 대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배안에 앉은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거의 남녀 짝을 지은 사람들이거나 여자끼리 온 사람들이었다.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많고 농사를 짓다가 온 듯 얼굴이 볕에 그슬린 사람들이 많았다. 그 중에도 데이트를 나온 듯한 젊은 커플도 간간이 섞여 있었다.

곽 경감은 테러리스트들을 만나게 되리라는 명령을 받고 왔기 때문에 그럴듯한 사람들을 찾으려고 노력했으나 그런 사람은 전혀 보이지가 않았다.

배가 잠수교의 낮은 다리 밑을 빠져나가 한남 대교 근방에 이르렀을 때였다. 신 대령 곁에 앉아 있던 40대 신사가 일어서서 좌석 밖으로 나왔다. 그가 성 유 내각 정보 국장이란 것을 그제야 곽 경감은 알았다.

성 유 국장이 좌석 밖 통로에 나와서 한참 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선내의 스피커에서는 서울의 강변 풍경을 설명하는 안내 스피커가 계속 왕왕 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테이프를 틀어 놓은 것 같았다.

곽 경감이 배안의 움직임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바로 자기 앞자리에 앉아 있던 젊은 여자가 일어나서 황급히 통로로 다가갔다.
여자는 성국장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곽 경감이 잔뜩 긴장하여 숨을 죽이고 보고 있었다. 그 여자는 성유국장을 보고 무어라고 간단히 말을 건넸다. 성 국장이 여자를 돌아보며 대꾸를 했다.
“여자 테러리스트구나!” 

곽 경감은 긴장해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 여자는 황급히 선실 밖으로 나갔다. 곽 경감이 나가려고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곁에 있던 파트너 여자가 그의 허리춤을 잡아끌어 앉혔다.
“넝감은 가만 있어유. 내가 좀...” 
여자가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늙은 여자치고는 행동이 대단히 재빨랐다. 곽 경감은 다시 숨을 죽이고 성 국장 주변을 응시하고 있었다. 밖에 나갔던 여자가 금세 들어왔다.

“아니여유. 그 젊은 여자가 멀미를 해서 뱃전에서 토하고 있어유.”
야자가 웃으며 곽 경감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곽 경감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그러나 그도 갑자기 가슴이 울렁거렸다. 배 멀미가 오는 것 같았다.
“저기!” 

그때 여자가 나직하고 날카롭게 말했다. 성유 국장 곁에 한 남자가 다가갔다. 정장 차림의 그 남자는 뒤로 돌아서 있기 때문에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나이는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정장 남자의 말을 듣고 있는 성유 국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두어 마디 서로 주고받던 두 사람은 나란히 뒤쪽으로 걸어왔다.
“이쪽으로 오는데... 늙었어요. 쉰 살은 훨씬 넘었겠는데... 저런 테러리스트도 있나?” 
곽 경감이 여자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여자는 아무 말도 않고 시침을 뚝 딴 채 딴 곳을 보고 있었다.

곽 경감이 앉아 있는 뒤쪽으로 걸어온 두 사람은 맨 뒤의 빈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곽 경감은 자기 뒤에 와서 앉았기 때문에 그들의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그 대신 귀를 바싹 곤두세우고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
“노형! 앞에서 두 번째 칸 내가 앉아 있던 자리가 보이지요?” 
늙은 테러리스트의 말 같았다.

“예. 저기 검은 가방이 놓인 곳 말이지요?” 
성유 국장의 대답이었다.
“그 가방에 든 것이 무엇인지 아시오? 내 호주머니에 있는 리모컨의 스위치만 누르면...” 
“아니!” 

성유 국장이 짤막한 신음 같은 말을 토했다.
곽 경감은 그것이 성능이 강력한 폭탄일 것이란 것을 금방 알았다. 만약 서툰 일을 하면 그 것을 폭파시켜 여기 탄 사람은 모두 물귀신을 만들겠다는 뜻일 것이다.
“그 스위치를 눌러야 할 일은 없을 것이요. 우리는 백 장군이 하라는 대로 충실히 하고 있소.” 

성유 국장이 곧 냉정을 되찾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짓말하지 마시오. 저기 한강 양쪽 강변에 특수부대 요원들이 쫙 깔렸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뿐 아니라 이 배 밑 한강 수중에도 무장 병력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뿐 아니라 이 배안에도 도청장치가 있어 외부에서 유리알 들여다보듯이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다행이 이 배에는 당신들 부하가 별로 없는 것 같소.” 
“사실과 다릅니다.” 

“별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것을 나는 문제 삼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라도 그렇게 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내가 이 스위치만 누르면 무고한 유람선 관객 수백 명과 함께 당신네 정부는 수장이 되는 거요.” 
“제발 그런 불행한 일이 없기를 바라겠소.” 
“같이 온 보좌관은 어디에 있소?” 

백장군의 목소리였다. 곽 경감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서 다리가 덜덜 떨리는 것을 느꼈다. 배 멀미가 더욱 심해졌다.
“앞에서 열두 번째 줄 흰 점퍼를 입고 있는 사람이요. 육군 소속입니다. 백 장군 일행은...” 
“가운데 빨간 모자를 쓰고 있는 젊은 여자가 보이지요? 그 여자가 들고 있는 큼직한 가방도...” 
“제발...” 

성유 국장이 더 듣기 거북한 모양이었다.
“우리는 이 민주화 운동을 시작할 때 이미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한 사람들이요. 우리는 언제 죽어도 좋아요. 필요 할 때는 주저하지 않습니다.” 
“잘 알고 있소.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우리는 추호도 백 장군 일행을 해칠 생각은 없소.” 

“나도 이 리모컨 스위치를 누르는 불행이 없기를 바라오. 또 나하고 같이 온 동지가 저 가방 속에 든 것을 세상에 공개하지 않도록 해 주시오.” 
백 장군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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