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사는 위가 나빠요.”
변 사장이 보충하는 양 말을 붙였다.
“아 그렇습니까?”
건성으로 대우하며 강형사는 시계를 슬쩍 보았다. 이이사가 자리를 비운 건 7분  남짓이었다.

“여기는 변 사장님이 업무 보실 일이 또 있을 것 같으니 장 이사님은 이사실로 가시지요.”
추 경감은 말을 공손히 했지만 스스로 몸을 일으켜 장 이사가 따라 일어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장 이사의 방도 변 사장의 방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단지 변사장방에는 깨끗한 경영학 책들이 꽂혀 있는 반면 장 이사의 방에는 너덜너덜한 전문 서적들이 꽂혀 있는 것뿐이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시는군요.” 

추 경감이 책장 앞에서 발음도 안 되는 영어제목을 보며 감탄한 모양으로 말했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발전이 없지요. 세상은 정말 눈부시게 변해 갑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살아 남을 수가 없지요. 이것도 적자생존의 한 형태라 생각됩니다. 이건 순전히 제  생각이지만 결국 과학의 발달에 의해 윤리 체계도 변하고 말 겁니다. 가령 시험관 아기 하나만 보아도 그렇지 않습니까? 사실 우리들이 하는 유전공학, 이것은 신에 대한  도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생명을 열고 있어요. 결국 모든 것은 변하는 겁니다.”
추 경감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장 이사의 말에 동조했다.

“그런데 경감님, 경감님도 그 편지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직은 잘 모르겠군요.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한 듯합니다. 김 묘숙 씨 사건 때 나온 쪽지와 동일한 것이라는 점이지요.”
“그렇다면 이건 역시 김박사님이 죽기 전에 제게 부친 거란 말씀이신가요?”
“아니오. 그렇지는 않습니다. 단지 동일인의 수법이라는 것밖에는......”
추 경감은 담배를 꺼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김 박사님은 자살이 아니란 말씀이신가요?”
“글쎄요. 하지만 이걸 정말  김 묘숙 씨가 보냈다고 믿으십니까? 김 묘숙 씨에게 무슨 원한을 산 게 있나요?”
“아닙니다. 천만에요.”
그렇다면 생각할 것도 없는 문제지요. 김묘숙 씨는 이런 편지를 부칠 이유가 없다, 그런데 동일인이 김묘숙 씨에게는 이런 쪽지를 남겨 두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뭣니까? 김묘숙 씨는 살해된 거지요.”
장 이사의 얼굴은 순식간에 흙빛이 되었다.
“그렇다면 누가......”
“그거야 누가 알겠습니까? 단지 이런 건 생각할 수 있겠지요. 장 이사님은 동일한 인물에게 협박을 받고 있으니 범인이 아니라는 것......”

강 형사는 추경감의 말에서 전혀 다른 것을 느꼈다. 추 경감의 말은 당신의 위계 정도는 내가 다 알지만 어떻게 일을 꾸려 나가는지 두고 보자고 하는 것 같았다.
“하, 제가 그런 말을 듣고자 한 게 아닙니다. 김 박사님이 살해되었다면 범인은 필경 그곳에 있던 사람들 중 하나라는 것인데 그럴만한 이유도, 또 이유가 있다 한들 그럴 시간이 어디 있으며, 또 시간이 있다 한들 어떻게 죽였단 말입니까?”

장 이사는 답답한 듯이 말을 했지만 가만 말을 살펴보면 사건의 핵심을 그대로 찌르고 있어서 강 형사는 고개를 들어 다시 장 이사의 얼굴을 살폈다.
“김 묘숙 씨의 사인은 독살이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추 경감은 여전히 무심히 물음을 던졌다.

“그, 자꾸 살인,살인 하시는데 정말 그건 이치에 닿지 않아요.”
장 이사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들리는 말에는 김묘숙 박사가 장이사님을 짝사랑했었다고 하던데......”
“예? 무슨 농담을......”
 

[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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