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이 아닙니다. 그런데 장이사님은 김묘숙 씨에게 그 점에 대해선 아주 냉담했다고 하더군요.”
“도대체 누굽니까? 그런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경감님께 한 사람은?”
장 이사는 말을 뚝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제가 마누라하고 사별한 지 6년쯤 되었습니다. 하지만 좋은 혼처가 나온다면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는 처지입니다. 만일 김 박사님 같은 분이 절 좋아했다면 제가 왜 다하겠습니까? 오히려 황감했을 겁니다.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저와 김 박사님사이는 전혀 그런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우린 서로 어려운 작업을 해나가며 동고동락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클래스메이트적인 우정에 불과했습니다.”
“남녀 사이에도 우정이 존재할까요?”
강 형사는 빈정대듯이 말했다.

“이거 왜 이러십니까? 정말 생사람 잡으시겠네요.”
장 이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허허, 진정하십시오, 장 이사님. 저희는 다만 주워들은 이야기를 확인해 보았을 뿐입니다.”
추 경감은 눈가에 잔주름을 지으며 웃었다.

시간은 무척이나 더디게 흘러갔다. 강 형사는 입 안이 바짝바짝 타는 느낌이었다. 점심은 셋이서 몰려나가 전혀 가본 적이 없는 데서 해치웠다.
“아직 3시가 안 됐는데 뭐 이럴 필요까지야 있습니까?”
  장이사는 여전히 농담이었지만 강형사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살인범은 페어플레이를 몰라요.”

살인범은 페어플레이를 모른다. 사람의 목숨을 건 일은 스포츠가 아니라
도박이다. 그런 범인이 3시 이후라고 한 이유는 뭘까? 강 형사는 밥을 반쯤
먹고는 수저를 놓았다. 이유는 하나밖에 있을수가 없었다. 범인은 실험배양실에서 때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김 묘숙이 죽으면 그 뒤를 장이사가 맡으리라는 건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는 김묘숙과 장주석 둘 사이의 어떤 공통분모가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그것이 사랑이건,기업의 비리이건. 실험배양실에는 흉기가 될 만한 것이 사실 여러 가지가 있다. 위험한 독극물도.하지만 범인은 결코 자신이 그런 것을 휘두를 만한 바보는 아니다. 벌써 이렇게 살인을 예고까지 하지 않았는가.강형사는 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추경감도 답답한지 재떨이엔 수북이 담배가 늘어갔다. 장이사도 이제는 긴장이 되는지 목 뒤로 흐르는 땀을 훔쳐내었다. 2시 30분.

“실험배양실에 가는 건 중지하십시오.”
“아니오. 싫소. 범인은 3시 이후라고 했고 그 이후로는 한정이 없잖아요. 오늘 실험배양실에 가지 않는다고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어요. 저는 평상시대로 볼일을 보겠습니다.”

“하지만 범인이 특별히 오늘을 찍지 않았어요? 오늘은 조심합시다.”
“살인범은 페어플레이를 하지 않는다고 강형사님이 그러셨던 것 같은데요.”
장 이사는 강형사의 말에 쐐기를 박더니 몸을 일으켰다.
“다녀오겠습니다.”]
“잠깐, 같이 갑시다.”
강 형사가 허둥지둥 같이 일어났다. 그러나 추 경감은 돌부처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경감님, 갑시다.”
강 형사가 툭 치자 그제야 추 경감은 꿈에서 깨어나듯이 일어났다.
실험배양실로 들어가는 절차는 꽤나 까다로웠다. 세균이 따라 들어가면 만사휴의라고 몇 가지 절차를 거치고서야 밀실과 같은 실험배양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잠깐만.”

장 이사가 제 1배양실 문을 열려 할 때 강 형사가 만류했다. 여러 사람이 들어가는 건 좋지 않다고 해서 추경감은 들어가지 않았다.

[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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