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 경감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강형사도 어지러운 새 정보를 정리해 보기 시작했다.
마약의 전달 루트는 천 경세, 구연희, 이 술균의 순서가 분명하다. 그러나 천 경세는 이미 구 연희와 이이사가 만나기 5,6년 전부터 이이사의 별장지기였고 이이사도 이미 그 전부터 마약을 복용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구 연희는 어떻게 그 사이에 끼어들었던 걸까? 강 형사는 바로 그 의문을 추 경감에게 제기했다.

“음. 오늘 내가 알아낸 사실을 정리해 보면 이렇다네. 우선 경리부정을 적발하기 위해 변 사장이 구 연희를 이 이사에게 보냈고, 구 연희는 쉽사리 부정을 발견했어. 그러자 이 이사는 구연희를 겁탈하고 마약 중독자로 만들었네. 하지만 구 연희도 녹록찮은 여자였단 말이지. 구 연희는 천 경세가 이 이사에게 마약을 공급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천 경세를 유혹한 거야. 그렇게 해서 천 경세, 이 이사, 구 연희의 마약 공급 루트를 뒤바꿔 버린 거지.”
“그것이 이 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겠지.”

추 경감은 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모든 사건은 헤쳐 나가는 과정에서 인간의 온갖 추한 모습이 발견되어졌다. 그것은 그 사건과 관련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했지만 인간에 대한 건강한 믿음에 항상 큰 흠집을 남겨 놓았다. 추경감의 지금 심정 역시 하나의 쓰레기 더미를 발견한 기분, 그 이상이 아니었다.
“김 묘숙도 장 이사도 마약 중독의 흔적은 전혀 없었어요. 또 전에도 말씀하셨듯이 둘이 업무 이외의 공통적인 사실을 알았다면 장 이사는 범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을 거구요.”

“그건 그렇긴 하지만 함부로 단정을 내릴 성질의 것은 아니야. 뭔가 사정이 있을 수도 있겠지. 가령, 이건 어디까지나 만약의 경우를 가정해서 말하는 거지만, 만약 이이사가 김 박사를 좋아했다면 그건 어떤 현상을 일으켰을까?”
“김 박사는 당연히 이이사를 거부했을 테죠. 유부남에 마약 중독자, 속까지 시커먼 간이니......”

“그래, 그래서 이이사가 김박사를 죽였다면.....”
“그렇다고 해서 장이사가 말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지 않나요?”
“글쎄, 장이사로서는 확신이 서지 않는 일에 이이사가 수상하다고 함부로 얘기할 수 없는 위치에 서게 되지. 자신의 이해관계가 개입되니까.”
“흐음, 그건 또 그렇군요.”

“어쨌든 이런 건 중요하지 않네. 이건 순전히 상상에 불과하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료이고 증거야. 또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이고. 그 때문에 이 사건에 개입된 각각의 인물이 위치하고 있는 곳을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었던 것이고. 오늘 자네의 수고로움도 거기서 비롯된 거야.”
추 경감은 말을 마치고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됐어. 피곤할 테니 그만 자게.”

“경감님, 더 이상 사람이 죽지는 않을까요?”
강 형사가 일어나면서 물었다.
“더 이상? 그렇다면 범인은 제 스스로 누구인지를 드러내게 되지 않겠나?”
추 경감이 힘없이 대꾸하며 손을 저었다. 잠이 악마같이 쏟아졌다.
“강형사, 일어나.”
추경 감은 소파에 길게 쓰러져 자고 있는 강 형사를 깨웠다.
“아이구, 몇 시나 됐다고 이러십니까?”

“8시 반이나 됐어. 그만 빨리 세수하고 오게. 아침이나 들러 가세.”
강 형사는 투덜대며 일어났다. 하지만 시경을 나설 때 쯤 해서는 다시 활기찬 걸음을 되찾았다.
“꿈속에서 좋은 계시라도 받은 것 없나?”
추 경감이 물었다.
“참, 경감님두. 피곤해서 아무 생각도 없이 잤습니다. 경감님은 뭐 계시라도 받으셨나요?”

“아니야, 아니야. 답답해서 그랬네. 도대체 범인이 뭘 노리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아니, 경감님. 무슨 말씀이세요. 범인을 알고 계시다는 겁니까?”
“음, 대충.”
“어? 어떻게 되신 겁니까?”
강 형사가 뜨악한 표정으로 물었다.
 

[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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