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때 숨겨진 주사기를 찾기 위해 마룻바닥을 두 장 벗겨 냈었지요. 그런데 지난번 사장님은 널빤지 하나만 젖히면 그까짓 거 설치는 간단하다고 하셨지요?”
“그거 비슷하게 말한 것 같군요. 하지만 그건 단순한 추측이었을 뿐이었소.”
“안 보고, 그리고 안 해보고 그걸 어찌 알았을까요? 뭐 그것도 좋습니다. 그거야 우기면 되는 문제니까요. 하지만 최주임의 증언은 어떨까요?”
“최 주임? 이런 제기랄. 이거 모략이야! 중상모략!”

변 사장은 흥분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추 경감은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경찰이 뭐 할 일이 없어서 중상모략을 한다는 거죠? 최 주임과 당신은 밀계를 하고 주사기를 설치했소. 김박사가 죽기 이미 며칠 전에, 이건 전반적인 일정을 잘 아는 사람이 짠 각본이었던 거요.”
“그런 거야 살인을 계획하는 누구라도 알아낼 수 있는 것이오!”
변 사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반박을 했다.

“끝까지, 끝까지 인간성을 회복하지 못하는군요! 당신은 캡슐로 알리바이를 세우고 자살처럼 김 박사의 죽음을 위장했소! 그리고 다시 죽음을 예고하는 쪽지를 남겨 김 박사가 장 이사를 죽인 건지, 장 이사가  김 박사를 죽인 건지 헷갈리게 해놓았소. 그건 정말 훌륭한 흉계였소. 우리는 그 순환 논리 속에서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소. 또 당신은 교묘하게 헤엄쳐 나가 수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 있었소. 연구진을 모두 죽이고
당신이 얻은 것은 신문지상의 이름 아니었소? 그리고 내일 아침에는 살인자라는 명칭이 붙을!”
“그게 무슨 험한 소리요.”  

변 사장은 다시 침착한 어투를 찾아가려 노력했다.
“나는 당신에게 이번 사건에 두 가지 단서가 있다고 했소. 그건 당신이 만든 두 개의 메시지. 그 활자를 오려 붙인 쪽지 말이오.”
“그게 어쨌다는 거지요?”

“당신이 신문활자를 오려서 살인예고 편지를 만들었지요. 아무도 필적을 못 알아볼 테니 신통하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그것이 당신의 실수요. 신문활자란 신문마다 그 모양이 다르다는 것을 몰랐죠? 글자를 보면 어느 신문에서 오려낸 것인가를 알 수 있단 말입니다.”

변 사장의 얼굴이 경련을 일으키듯이 꿈틀댔다.
“놀라실 말하지요. 유전공학도 최첨단과학이지요. 하지만 그만큼 수사도 과학화되어 있다는 걸 아셨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그 활자들을 분석해 보았지요. 두 장의 살인예고 편지에 쓰인 글자는 세 가지 신문에서 따낸 글자더군요. 그 세 신문, 즉 조간 B신문, C신문과 석간 A신문을 받아본 집은 사장님 집뿐이더군요.”

“신문은 거리에 나가면 한 장에 300원밖에 안 합니다.”
변 사장은 냉소적인 투로 말했다.
“이제는 마지막 팡파레를 울려야 하지 않을까요?”
“허허, 무슨 말씀들인지......”
변 사장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참 끈질기게 버티시는군요. 그럼 변 사장님, 이건 어떨까요?”
강 형사는 말을 하며 세 권의 스케치북을 탁자 위에 툭 던졌다.
“헉!”
변 사장이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우리는 쓰레기통까지 뒤져 보았죠. 하지만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었죠. 그때 우리에게는 하나의 영감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갔지요. 사장님은 늘상 신문과 가위를 손에 쥐고 있을 수 있었다는 그 사실을 상기한 거예요. 김 박사의 스크랩이라는 명목하에 말이지요. 이 세 권의 스케치북이 무엇인지 모르시지는 않겠지요? 바로 그 스크랩이니까요. 자, 한번 보시지요.”
강 형사는 스케치북을 펼쳐 후두둑 넘겨보았다. 군데군데 어린아이 앞니 빠지듯이 빈 곳이 보였다.

‘우리는 이 없어진 활자들을 모아 보았어요. 무슨 글이 나왔다고 여기십니까?“
강 형사의 빈정댐에 변 사장은 드디어 고개를 떨구었다. 
“우리를 괴롭힌 사실은 김 박사와 장 이사, 이 두 피해자가 갖는 공통점이 과연  무엇 이었던가 였습니다. 처음에는 사장님이 쳐놓은 함정대로 사랑인 것으로 착각하고 수사가 진행되었지요. 하지만 그건 아무런 증거가 없는 것이었어요. 가장 유력한 혐의자인 사장님 말씀 말고는요.”

“그만하시오, 그만.”
강 형사의 이죽거림에 변 사장은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왜, 이제야 양심에 가책이 되십니까? 이처럼 치밀한 계획범죄는 다시 찾아보기 힘들 것처럼 여겨질 정도요. 우리는 장 이사가 죽기 전까지, 아니 죽은 뒤에도 사건의 동기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으니까.”

“마지막 문제는 신문이 풀어 주었소. 강형사, 내가 이번 살인은전체적인 입안이 최근에 된 거라고 했었지? 그건 유전공학 실험이 워낙 까다로운 것이라 99퍼센트 정도 진척되기 전에는 성공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한 이야기였다네. 변 사장, 당신은 모든 공정이 끝난 뒤 그 공만을 빼앗아 명예를 얻고자 했던 거요.”
“됐소. 그만하시오, 이제.”
“연행하도록 해.”
추 경감은 임석 순경에게 지시했다. 고개를 꺽은 변 사장은 순순히 순경의 뒤를 쫓아 나갔다.

“무진은 이로써 끝이군요.”
강 형사가 씁쓸하게 추 경감에게 말을 건넸다.
“그렇지. 사장도 없고 경리도 엉망이고, 연구진도 풍비박산이 났으니. 하지만 무진은 없어져도 유전공학의 개가는 남을 걸세.” 

“한 사람의 미친 명예욕 때문에 아까운 석학들만 사라졌군요. 저 변 사장이야말로 돌연변이 같은 존재예요. 겉은 번지르르하게 아름답지만 열매는 호박이 열린다는 이번 제품, 호박이 열리는 장미나무란 바로 변 사장의 혹심을 알고 만들어 낸 제품 같군요.”
“후훗, 사과가 열리는 장미나무 같은 인간이라......”  
추 경감은 다시 주름투성이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그래, 실패한 문학도가 할 만한 이야기로군.”

“예? 실패한 문학도라고요? 이거 왜 이러십니까? 옥은 흙 속에 묻혀도 옥이라고요.”
“자네가 옥이라고?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오늘은 우리 집에나 가지. 마누라보고 호박죽을 끓여 놓으라고 했으니 같이 반주나 하도록 하세.”
“그러죠, 뭐.”

저녁 햇살을 받고 돌아가는 두 사내의 그림자가 처량하게도 길게 늘어지고 있었다. 
 

[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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