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6·15 남북공동선언’이 3주년을 맞이했다. 2000년 6월15일 분단 55년만에 남북정상이 만나 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열었지만 3년이 지난 지금 남북한의 현실은 냉담하기만 하다. 북핵문제는 여전히 국제적인 골칫거리로 남아 있고, 한국은 김대중(DJ) 전대통령 퇴임이후 대북송금 특금이 진행되면서 정상회담의 역사성과 순수성마저 훼손되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에 여야 정치권은 대북송금 특검 연장 및 DJ 수사 여부를 놓고 지금 이 시간에도 지루한 논쟁을 벌이고 있는게 현실이다. <일요서울>은 ‘6·15 남북공동성언’ 3주년을 맞아 전·현직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노무현 대통령)과 광주(김대중 전대통령)의 민심을 들어봤다.PK(부산·경남)지역은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이나 다름없다. 특히 부산은 노 대통령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정치적 자산이라 할 수 있다.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 노 대통령이 부산 공략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던 것은 무엇보다 자신의 고향에서 높은 지지를 얻고 싶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노 대통령의 이러한 열정과 애정은 당시 ‘동남풍’이 되어 서서히 북상을 했고, 결국 어렵고 힘든 선거를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 됐다. 하지만 ‘6·15 남북공동선언’ 3주년과 노 대통령 취임 4개월이 채 안된 현재 부산 민심은 심상치 않다.민심 취재차 부산역에 내린 기자는 이러한 민심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부산역 근처 조그마한 슈퍼에서 물건을 사고 계산을 요구하자 슈퍼 주인은 계산은 뒷전이고 “한심들 하구먼”이라며 혀를 찼다. 부산 사람들이 좀 투박하다는 인식은 가지고 있었지만 가게를 찾은 손님에게 ‘좀 심하지 않나’ 하는 속 마음을 억누르고 기자는 다시 한번 ‘아저씨’를 불렀다. 그제서야 가게 주인 정모씨는 “미안합니데이”하면서 기자를 쳐다봤다.

계산을 하면서도 정모씨의 시선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기자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정모씨의 시선이 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가게 주인인 정모씨가 손님 맞는 것도 뒤로 한채 시선을 집중한 곳은 다름아닌 가게 모통이에 설치한 TV모니터. TV에서는 ‘6·15 남북 정상회담’과 대북송금 특검 문제 등과 관련한 뉴스가 진행되고 있었다.기자는 순간적으로 ‘이 아저씨가 정치나 시사문제에 관심이 많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마침 민심 취재차 내려온 만큼 아저씨에게 “정치에 관심이 많은가 보죠”라며 말을 걸었다.하지만 예상과 달리 정모씨는 투박한 말투로 “정치요? 마 관심도 없슴다”며 말문을 열었다.정모씨는 “경기는 안좋은데 정치판은 특검이다 DJ조사다 하면서 쌈박질만 하고 있으니 화딱지가 나서리…”하면서 말끝을 흐렸다.

다만 그는 “DJ나 노무현이나 다 똑같은 한통속 아인겨. 정치판 돌아가는거 다 끼리끼리 짜고 하는 거니까 신경쓰고 싶지도 않다. 제발 서민들 잘 살게만 해줬으면 좋겠음더”라고 덧붙였다. 기자는 좀더 생생한 민심을 전해듣기 위해 자갈치 시장으로 향했다.시장 입구에서 만난 40대 아주머니는 “잘못 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전직 대통령이라고 봐주면 국민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여”라며 DJ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표출했다. 또 “노 대통령도 측근들 비리가 속속 드러나고 있는 만큼 캥기는게 없지 않을 것”이라며 노 대통령에 대한 불만도 토로했다.자신을 실향민이라고 밝힌 50대 김모씨는 “그때(남북정상회담)는 참 좋았지라. 금방 통일이라도 될 것 같아 실향민들과 밤새 술을 마시며 들뜬 기분으로 생활했다 아인겨. 근데 이제와서 뒷거래니 불법이니 하는 말들이 나오니까 앞이 깜깜할 뿐이라예”라며 서운함을 감추지 않았다.

동정론도 없지 않았다.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50대 이모씨는 “그 양반(DJ) 불쌍하다 아인겨. 팔순 노인인데다 몸도 불편한데 너무 몰아 세우는게 아인가 싶네예”라고 말했고, 또다른 상인 조모씨는 “DJ는 세계가 인정하는 지도잔데 왜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그 양반을 나쁜 사람으로 몰아가는지… 이라모 결국 나라 망신 아인겨”라며 정치권의 논쟁을 질타했다.부산 시민들이나 대학생들의 견해도 엇갈렸다.부산의 중소업체 과장인 박모씨는 “남북정상회담의 본질을 훼손시켜선 안되지만 대북지원 과정에서 불법이나 편법이 있었다면 이번 특검을 통해 발본색원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사상구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김모씨도 “향후 투명하고 발전적인 남북관계를 위해서라도 대북송금 의혹은 철저히 규명돼야 하고, 필요하다면 DJ에 대한 수사도 불사해야 한다”는 강경론을 펼쳤다.

반면 부산대 법대를 다니고 있는 최모씨는 “남북정상회담은 법의 잣대로 재단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건이고 통치행위인 만큼 그 평가는 역사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또 부산 노사모 회원인 조모씨는 “DJ에 대한 수사는 곧 역사적인 정상회담의 본질을 훼손시키는 우를 범할 수 있는 만큼 국익과 향후 남북관계를 고려해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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