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권의 내부자 금융사고가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다. 금융사고는 직원들의 모럴 해저드가 주원인이지만 운영 시스템상 허점과 방심은 또 다른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최근 하나은행에서 일어난 25억원대 금융사고는 이같은 원인들의 집약판격이다. 특히 이번 횡령 사고는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6월까지 총 8회에 걸쳐 일어난 것으로 대출 절차상의 허점이 노출되고 있다.명의도용 첫 2억대출… 사채빌려 갚으려다 빚 눈덩이로이번엔 사채갚으려 계속 범행… 대출 절차상 허점 드러나사고가 일어난 곳은 강남구에 위치한 하나은행 모 지점. 횡령 사고의 주인공 한모(35, 남) 과장은 기업금융담당(RA) 직원이었다.

이 지점은 기업 중에서도 주로 중소기업금융을 취급하는 곳이다.하나은행에 따르면 한모 과장은 중소기업의 대출이나 여신 관리 등을 맡고 있었다. 대출을 받기 원하는 중소기업은 절차상 한 과장을 거쳐야 했다. 한모 과장이 대출에 필요한 각종 사항을 전산망을 통해 보고하면 중소기업금융 부문 최종결정자(RM)가 대출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경찰에 따르면 한 과장은 선배를 돕기 위해 지난해 11월 자신이 고객이 돼 2억원을 대출받았다. 그런데 전산망에 기록된 대출인은 한 과장 자신이 아닌 S산업 대표이사인 권모씨. 한 과장이 권모씨의 이름을 무단으로 빌려 이 돈을 대출 받은 것.한 과장은 이 돈을 갚지 못하게 되자 이때부터 사채를 끌어 썼다. 그러나 이것이 화근이었다. 사채의 높은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면서 부동산에 눈을 돌린 것. 부동산 투자로 돈을 모아 사채를 변제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수중에 돈이 없던 한 과장은 부동산 투자자금을 또 은행 금고에서 해결했다. 처음 대출 받은 돈 2억원이 설상가상으로 올해 6월까지 25억6,000만원으로 부풀어올랐다.경찰에 따르면 한 과장이 거침없이 금고에서 돈을 뺄 수 있었던 이유는 전산망에 대출 신청을 해 내부 승인이 난 것처럼 가장한 것.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은 어떻게 한 과장 스스로가 대출을 결정지을 수 있었느냐는 점이다. 하나은행의 말대로라면 한 과장 위에는 최종결정자(RM)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사고에서 결과적으로 RM은 있으나마나 했던 것.업계에서는 이 까닭을 몇 가지 가설로 추론하고 있다. 먼저 한 과장이 스스로 최종 결정까지 내릴 수 있을 정도로 전산시스템이 허점투성이였을 가능성이다.


또 한 과장과 최종 결정자의 공모 또는 암묵적 합의도 배제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대출 업무에 관한 직원들의 기강이 느슨해졌다는 것이다. 공식적인 절차는 있되 비공식적으로는 최종 승인까지 절차가 무시됐을 수 있다는 것.하나은행은 사고의 모든 경위에 대해 자체 조사를 벌이고 있어 결과가 나와야 알겠지만 업계에서는 전산시스템의 허점이나 공모 가능성은 희박할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직책별 책임 의식 부재가 주원인이었을 공산이 크다고 분석한다. 하나은행측은 조사가 진행 중이기 때문에 어떠한 답변도 하기 힘들다는 입장이다.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섣부른 가정을 경계하고 있다.금감원에서도 이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하나은행의 자체 조사 결과 보고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금감원의 한 관계자는 “하나은행의 보고 내용에 따라 사고 처리 방안을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금감원은 이와는 별도로 7월중 전체 은행을 대상으로 정기 검사를 예정하고 있다.하나은행은 이번 금융사고가 외부로 알려지게 된 경위에 대해 은근한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한 예로 경찰이 한모 과장을 적발, 검거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과는 다른 과장된 표현이라는 것이다.하나은행은 은행이 자체 감사를 통해 한 과장의 불법 대출을 적발했고 은행 스스로 한 과장을 경찰에 고발했다는 것. 또 한 과장이 경찰에 스스로 자수를 했다고 주장했다.하나은행의 불만은 경찰이 마치 경제사범을 자체 수사력을 동원해 검거에 성공한 것처럼 알려져 은행의 이미지와 도덕성에 타격을 입힐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은행의 불만 속에는 한 과장의 사고가 조용히 수습되기를 바라던 것이 깨진 것이 가장 크다.

그러나 실제 경찰의 설명은 하나은행과는 좀 다르다. 경찰에 따르면 한 과장은 하나은행이 감사에 들어가자 잠적해버렸고 은행이 자신을 고발하자 은행에 스스로 찾아갔다. 은행의 연락을 받고 경찰이 비로소 은행에 찾아가 한 과장을 연행한 것이다.경찰은 무리하게 수사 성과를 확대하려 하지 않았음에도 하나은행이 예민한 반응을 보이자 드러내지는 않지만 내심 불쾌한 눈치다.금감원은 금융권의 횡령 등 사고에 대해 모방범죄를 일으킬 소지를 따져 최고경영자나 법인에 경고 또는 벌금을 내리고 있다. 하나은행의 사고에 대해서는 모방범죄 가능성은 커 보이지 않으나 혐의에 보이는 죄질이 좋지 않다고 보고 있다. 금감원의 한 관계자는 “은행 스스로 직원들의 소양 교육을 강화하고 내부 감시 시스템을 강화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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