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그룹서 인수전 계열사였던 중앙종금 보증서 준게 문제외한은행 등서 소송제기 … 은행측 패소 불구 항고 소지 남겨아남반도체가 자칫 600억원을 날릴 위기에 처해졌다. 동부그룹에 인수되기 전 아남반도체가 체결한 일종의 ‘확약서’가 이제 와서 위력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이 ‘확약서’ 내용은 한 역외펀드로부터 채권을 인수한 은행들에 아남반도체가 안정된 채권 회수를 약속한다는 것. 동부가 야심찬 계획하에 입적시킨 양자가 대형 사고를 잉태하고 있었던 셈이다.

특히 사고의 배경에는 아남반도체의 옛 오너인 김주진 암코테크놀로지 회장의 독단적 결정이 자리잡고 있어 동부와 아남의 감정 대립 양상마저 보이고 있다.아남반도체로 하여금 600억원을 날릴 위기를 제공한 직접 요인은 확약서이지만 보다 근본적 요인은 문제의 역외펀드였다.‘퍼시픽 엘리펀트 인베스트먼트’라는 이름의 이 역외펀드는 지난 95년 중앙종금이 조세피난처인 말레이시아에 설립했다. 이 역외펀드는 세계 채권 및 주식에 투자를 했으며 지금도 근근히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펀드에는 국내 S은행 등 제도금융기관들도 일부 출자를 하며 정식 이사로 활동했다.

설립당시 퍼시픽 엘리펀트의 자본금은 200만달러(240억원)로 지금까지 한차례의 증자도 없었다. 펀드 설립 직후 외환은행 등 국내 5개 은행은 펀드에 3,800만달러(456억원)를 운용자금으로 위탁했다. 아남반도체가 작성한 확약서는 바로 이 자금 위탁으로 발행된 채권의 손실 보전에 관한 것.아남반도체에 따르면 확약서를 작성하게 된 경위는 옛 오너인 김주진 회장의 지시에 의한 것. 중앙종금의 김석기 사장이 김주진 회장에게 보증을 요구한 것이다. 중앙종금이 아남반도체의 자회사였기 때문에 퍼시픽 엘리펀트는 사실상 김주진 회장과 아남반도체의 특수관계에 있었다. 당시로서는 같은 계열사끼리 이면보증은 재벌의 관행이었다.더욱이 김석기 사장과 김주진 회장은 매우 친밀한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져 김주진 회장은 별다른 계산 없이 확약서를 작성해줬다.확약서의 정확한 내용은 이렇다.

펀드 자산의 가치가 일정 비율 이하로 떨어지면 자산가치가 일정액에 이르도록 추가로 아남반도체가 펀드의 주식을 인수한다. 또 차입금 상환기일에 펀드가 차입금 상환이 어려울 경우 아남반도체가 차입금을 상환하고 더불어 주식도 추가로 인수한다는 것. 사실상 아남반도체가 펀드 수탁고의 ‘봉’ 역할을 한 셈이다.외환은행 등의 자물통 손실보전 요구는 결과적으로 은행에 거액의 손실을 방지하게 했다. 펀드 설립 이후 퍼시픽 엘리펀트가 형편없는 투자실적을 내며 자산의 대부분을 손실로 까먹은 것.5개 은행에 따르면 99년 10월이 되자 펀드의 자산가치는 총 채무의 55%에 불과했다. 이때부터 은행이 아남반도체로부터 받아놓은 확약서가 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외환은행 등은 아남반도체에 출자를 요구하는 한편 펀드는 2001년 아남반도체에 580여억원 상당의 신주를 배정하는 이사회 결의를 했다.은행은 확약서 이행 요구에 아남반도체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2001년초 소송을 제기했다.

은행의 요구는 아남반도체가 신주인수대금을 은행에 지급하라는 것.소송의 쟁점은 확약서가 적법한 절차를 거쳐 작성된 것이냐 여부다. 확약서에는 ‘확약서 작성, 교부, 이행을 승인하기 위한 모든 필요한 조치를 취했다’고 명기돼 있다. 이에 대해 아남반도체는 당시 오너였던 김주진 회장이 단독으로 결정한 사항이었을 뿐이라고 반발하고 있다.2년을 끌어오던 소송은 지난 6월말 은행의 패소로 판결이 났다. 흥미로운 것은 판결 내용이 다소 애매하다는 점. 판결문에 따르면 아남은 은행이 요구하는 신주인수대금은 지급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재판부는 신주인수 확약은 유효하다고 했다. 은행으로 하여금 아남반도체가 신주를 인수해야 한다는 항고를 할 여지를 남겨둔 것이다.은행도 이점에 주목하고 그와 같은 요지의 항고를 할 계획이다. 아남반도체도 이에 맞서 김석기 전사장의 사기성, 외국환관리법 규정상 신주인수의 적법성 여부 등 반박 논리를 펼 태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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