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가산정 절대기준없어 오너일가 시세차익의 적법창구로 활용법원서 최태원 SK회장에 ‘배임’ 혐의 적용 하면서 새 국면 맞아강철규 공정위장“경제 하강시점서 재벌 종양 수술할 것”안전한 줄로만 알았던 재벌의 비상장사 주식 거래가 자칫 시한폭탄으로 둔갑할 수도 있게 됐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부당내부거래 조사에서 비상장사의 거래도 포함시킴에 따라 재벌이 긴장하고 있다. 특히 총수 일가가 비상장주 거래를 통해 계열사로부터 부당지원을 받았다는 의혹은 이번 조사에서 초미의 관심사. 재계는 법원이 최태원 회장에게 비상장주 거래에 대해 ‘배임’ 혐의를 적용시킨 것이 공정위 조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공정위의 유권 해석 범위가 그만큼 넓어지기 때문이다.

비상장사 주식 거래에 공정위가 조사를 벌일 방침임이 알려지자 기업들이 긴장하고 있다.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는 듯하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다. 그동안 언론 등을 통해 알려지지 않았던 거래 내용들이 드러날 가능성이 농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최근 공정위가 국회 정무위에 제출한 자료에서 보여지듯 국내 재벌들의 부당내부거래에 비상장사가 빈번히 얽혀 있었다. 이 자료는 지난 98년부터 2000년까지 재벌들의 부당내부거래를 분석한 것이다.자료에 따르면 이 기간에 삼성 현대 LG SK 등의 전체 부당내부거래액은 20조3,155억원. 특히 비상장사에 의한 부당지원액은 9조6,372억원(47.4%)에 달했다. 비상장사는 외부로부터 정보 접근이 차단된다는 점을 악용해 비상장사를 자금이동의 터미널로 여긴 결과다.비상장주 거래는 그동안 전환사채(CB)나 신주인수권부사채(BW)에 비해 상대적으로 공정위의 관심을 덜 받았던 게 사실. CB나 BW는 재벌들의 편법 증여·상속의 수단으로 상당 부분이 외부로 노출돼왔다.

비상장주 거래나 CB, BW 인수는 총수 일가의 지배력 강화 및 편법 상속 수단으로 널리 알려져왔다. 이들 방법은 대략 2000년을 기점으로 CB, BW는 이전, 비상장주 거래는 이후에 자주 활용돼왔다.CB, BW에 관해서는 삼성 이재용 상무가 삼성SDS와 삼성에버랜드의 사채를 인수한 것이 대표적 사례. 이에 대해 공정위와 국세청은 이미 과징금 및 추징금을 부과한 바 있다.시민단체에 따르면 2000년 이후 비상장주 거래가 활발해진 이유는 CB나 BW에 비해 법적으로 안전하기 때문. CB, BW는 훗날 주식으로 전환 또는 신주를 인수할 권리가 주어지기 때문에 기업의 미래가치가 가격에 반영돼야 한다. 기업들은 이점에 주목해 미래가치가 불투명하다는 핑계로 총수일가를 상대로 저가에 사채를 넘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그러나 이 수법은 총수 등이 거액의 시세차익과 함께 지배구조를 교묘히 이용해 그룹을 지배한다는 의혹이 일면서 주춤했다.

그만큼 문제의식이 확산되고 도덕성 논란과 소송이 빗발쳤기 때문이다.이에 반해 비상장주 거래는 주가 산정시 대부분 상속세법에 의한 평가법을 적용해 최대한 ‘법의 틀’에 끼워맞추려 했다. 상당수의 경우에 주가가 고가에 형성됐다는 의혹이 일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해당 비상장사와 동일한 업종의 상장사 시가를 비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비교 잣대일 뿐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었다.비상장주 거래에서 재벌들은 상당한 시세차익을 올리면서도 법적 책임에서 비교적 안전했던 것.그러나 이 방법이 공정위의 안테나를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지난 2000년 LG화학으로부터 구본무 회장 등 대주주 일가가 LG석유화학 주식을 헐값에 사들였다는 공정위의 부당내부거래 판정이 대표적 사례. 이로 인해 LG화학은 79억원의 과징금을 물었다.그러나 대주주들은 LG석유화학이 상장하자 지난해 4월부터 주식을 처분해 약 1,900억원대의 시세차익을 챙겼다.

이에 대해 참여연대는 구본무 회장 등에 대해 ‘배임’을 적용해 주주대표소송을 진행 중이다.삼성 이재용 상무의 e-삼성주 매각도 공정위 조사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01년 이재용 상무는 자신이 이끌던 e-삼성이 사업성이 없다고 판단되자 계열사에 e-삼성주를 고가에 매각했다는 의혹이 일었다. 이에 공정위가 조사에 나섰으나 무혐의로 판정 났다.그러나 삼성이 구조조정본부 차원에서 공정위 조사의 대처 방안 문건을 작성한 사실이 드러나 문제가 달라졌다. 공정위가 이에 대해 불쾌감을 갖고 있는데다가 참여연대가 사건을 재조사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공정위는 e-삼성 주식 거래에 대해 재조사를 벌일 것으로 보인다.e-삼성과 비슷한 시기 현대자동차 정의선 부사장이 e-HD닷컴 주식을 현대차에 고가에 매각했다는 의혹이 있었다. 역시 공정위는 무혐의 판정을 내린 바 있다.그동안 공정위는 비상장주 거래에 대해 몇 차례 조사를 벌였다. 그러나 부당내부거래로 인정된 거래는 단 몇 차례밖에는 없었다. 그만큼 기업들이 철저하게 법적 검토를 거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조사는 과거에 비해 강도가 높을 것으로 보인다.이유는 대략 두 가지로 정리된다. 먼저 강철규 위원장의 의지가 확고하다는 것과 법원이 최태원 회장에 대해 배임 혐의를 인정한 사례 등이다.강철규 위원장은 부당내부거래조사로 인한 경제 위축을 들이대며 으름장을 놓는 재벌들에 대해 “경기 하강시점에 종양을 수술해야 한다”며 조사 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다. 또 법원은 최태원 회장의 비상장주 거래에 대해 “(주가) 평가기준은 잘못이 아니지만 배임 혐의는 인정된다”며 배임 판정을 내린 것도 조사의 한 방향을 설정해주고 있다. 주가 산정은 적법할지 몰라도 대주주를 상대로 거래하는 기업은 손실을 입을 수 있다는 논리다. 법원의 심판은 기업이 내세우는 1차원적 적법성 논리를 뛰어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재벌의 비상장주 거래는 적법성과 도덕성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오던 게 사실. 공정위의 이번 조사에는 비상장주 거래에 대해 하나의 기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또 조사 결과에 따라 재벌 개혁의 수위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됨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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