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는 동물들중 인간과 가장 친하게 지낸다. 개가 가축으로 사육된 역사는 1만5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만년이라는 설도 있다. 원래 개는 늑대였는데 인간이 먹다남은 음식물 찌꺼기를 훔쳐먹으러 가까이 접근했다가 인간과 가깝게 되었다. 개가 인간의 심심풀이 친구로 그리고 도둑을 지키고 망을 보는 조역으로 신뢰받게 된데는 필시 연유가 있다. 개는 여느 동물과는 달리 인간의 일부 의사전달 신호를 해석할 지적능력을 소유하고 있으며 인간의 손짓과 눈짓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과 가장 많이 닮은 침팬지와 개의 인지능력을 비교한 연구가 있다. 이 연구에 따르면 냄새를 차단시킨 작은 상자 둘을 침팬지와 개 앞에 내 놓았다. 한 상자에는 음식을 넣었고 다른 상자는 비었다. 연구자는 개와 침팬지가 보는 앞에서 음식이 든 상자를 톡톡 치기도 했고 손가락으로 이 상자를 가리켜 보이기도 했으며 눈으로 유심히 쳐다보기도 했다. 음식물이 들어있다는 암시였다. 그후 개는 바로 음식이 든 그 상자를 선택했고 침팬지는 그렇지 못했다. 멍청했다. 이런 개의 인지능력은 본능적으로 태고적부터 다른 동물과 달랐고 인간과 함께 살면서 더욱 발달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그런데 어떤 인간은 그런 개에 미치지 못하는 인지능력을 갖고 살아간다는데서 부끄럽다. 집에서 애완용이나 방범용으로 키우는 개를 풀어줘 온 동네 길목을 역거운 개 배설물로 더럽히는 개 주인이 그들이다. 어떤 개 주인은 배설 할 시간대가 오면 슬며시 풀어 대문 밖으로 내보낸다. 나가서 남의 집 대문 앞이나 길바닥에 실례하고 돌아오라는 인간의 의사전달 신호이다. 또 어떤 개 주인은 새벽이나 저녁때가 되면 배설시간대에 맞춰 개를 끌고 산책길에 나선다. 그리고는 개가 남의 집 대문이나 담 밑에서 머뭇거리다 실례를 할 때는 먼 산만 바라 보는 척한다. 그러다가 개가 용무를 끝내면 모른 채 유유히 사라진다. 개의 배설물보다 더 더러운 인간의 양심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역겨운 인간의 양심과 얌체족 때문에 주택가 길바닥은 배설물로 더럽다. 서울의 평창동과 성북동 등 전용주택가일수록 심하다. 모처럼 산책나온 사람의 비위를 뒤집어 놓는다. 개 주인은 그런 추한 짓을 하면서도 태연하기만 하다. 누구한테도 들키지 않았기 때문에 괜찮고 풀어놓은 개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알바없다고 자기자신을 기만한다는데서 그렇다. 하지만 동네 사람들은 누구의 개인지는 모르지만, 그 놈의 주인이 개만 못한 사람이라고 저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개 주인은 그런 욕설을 직접 듣지 않는다고 해서 편안하다. 음식이든 상자를 분별해 낼 수 있는 개보다도 인지 능력이 떨어지는 인간 멍청이가 아닐 수 없다. 이제 정부와 민간단체가 나설 때가 되었다. 특히 지방정부의 책임이 크다. 서울 특별시는 청계천 고가도로를 허물어 내고 청계천을 복원하는 거창한 사업도 중요하지만, 깨끗하고 위생적인 주택가 환경조성도 그에 못지않게 중대 사업임을 직시해야 한다. 무슨 환경단체 라는 것들도 숲 살리기나 갯바닥 살리기 못지않게 주거환경 살리기도 소중함을 깨달아야 한다. 서울시와 구청 그리고 전국의 지방정부들은 개 배설물 근절 캠페인을 벌이지 않으면 안될 때가 되었다. 방견하거나 개를 끌고다니며 배설시키는 자에게는 벌을 주는 조례를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 ‘방견 및 개 배설물 금지’라는 현수막이라도 우선 동네별로 내 걸어야 한다.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주택가에서 배설물을 볼 수 가 없다. 개를 기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개 주인의 수준이 높기 까닭이다. 그들은 개를 끌고 산책하다가 개가 실례를 하면 반드시 비닐 봉지 같은 것을 꺼내 손주 주워담는다. 이른 아침 몰래 풀어줘 남의 집 담 밑에 가서 실례하고 돌아오도록 하는 추한 짓은 절대 안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개 끌고 다니는 자는 반드시 비닐 봉지를 지참하고 스스로 치우도록 법제화해야 한다. 깔끔하고 위생적인 주거환경을 이루고 더러운 양심을 씻어 내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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