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 정외과 졸업 … 외교관 생활거쳐 한때 청와대 경호실 근무70년대초 대한태권도 협회장직 맡으며 본격 스포츠 외교 개척88올림픽 유치·태권도 올림픽 종목채택에 일등공신“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너무한 것 같습니다.” 지난 6일 오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를 마치고 입국한 김운용 IOC 부위원장이 던진 일성이다. 김 부위원장은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가 무산된 이후 그가 IOC 부위원장 당선을 위해 유치 반대운동을 벌였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김 부위원장의 강력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유치 무산에 따른 ‘책임론’은 정치권 공방 및 김 부위원장의 사과와 공직사퇴 요구로 비화되고 있다.

특히 평창 유치 지원차 체코 프라하에 머물렀던 고건 총리와 이창동 문광부 장관이 IOC 총회가 열리기 하루 전날 김 부위원장을 만나 평창 유치를 위해 ‘IOC 부위원장 불출마 선언’을 요청했던 것으로 알려지면서 파문은 일파만파 번지고 있는 형국이다. 국제 스포츠계의 거물이자 한국 스포츠 외교를 주도했던 김 부위원장이 이번 평창 유치 스캔들을 어떻게 돌파할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김 부위원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국제 스포츠계의 거물이다. 현재 민주당 국회의원(전국구)이지만 그는 정치인 보다 스포츠계 거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김 부위원장이 ‘20세기 세계 스포츠계를 이끈 30인’과 ‘가장 영향력 있는 국제 스포츠계 인사’로 5회 연속 2위에 꼽혔다는 사실은 그가 국제 스포츠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31년 3월 경북 대구시 봉산동에서 태어난 김 부위원장은 경동고를 거쳐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와 동대학원 정치과를 졸업했다. 6·25전쟁 중 군에 입대한 김 부위원장은 탁월한 어학실력으로 한미 전시공조 체제에 일조했고, 61년 장면 내각수반 의전비서관으로 출발해 63년 주미대사관 참사관과 주UN대표부 및 주영대사관 참사관 등 외교관 생활을 잠깐 하기도 했다. 또 68년부터 74년까지는 박종규 대통령경호실장 밑에서 보좌관을 지낸 이색 경력도 가지고 있다.

김 부위원장이 한국 스포츠 외교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70년대 초. 71년 대한태권도협회장, 73년 세계태권도연맹 총재, 74년 대한체육회 부회장겸 KOC부위원장 등을 지내면서 한국 스포츠 외교를 이끌었다.81년 서울올림픽 유치 당시에는 자신의 외교적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 한국 스포츠계의 거물로 등극하는 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이후 김 부위원장은 83년 IOC승인 국제경기연맹연합회 회장, 84년에는 국제경기연맹총연합회(GAISF) 부회장, 86년 IOC부위원장으로 선출되어 각국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계 스포츠 발전을 위한 정책수립에 앞장서는 등 국제 스포츠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88년 서울올림픽 조직위 부위원장으로 활동할 당시에는 동서 이데올로기를 무너뜨리는 평화와 우호의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이처럼 한국 스포츠 외교를 견인하며 국제 스포츠계 거물로 성장한 김 부위원장은 ‘한국 태권도의 대부’라는 또다른 닉네임이 붙어 다닌다.태권도가 94년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는 등 세계적인 스포츠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김 부위원장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김 부위원장의 스포츠 외교와 한국 태권도의 성장사는 상당부분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73년 세계태권도 연맹(WTF)이 결성될 당시 그는 초대 총재를 맡았다. 이후 제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를 개최한 것을 시작으로 75년 국제경기연맹 총연합회에 가입했고, 76년 국제군인체육대회(CISM)때는 태권도가 정식종목으로 채택됐다.

또 80년에는 국제 올림픽위원회(IOC)정식종목으로 승인을 받았고, 88서울올림픽시범경기에 이어 2000년 시드니 올림픽경기대회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처럼 김 부위원장은 그동안 무도로 인식되어 왔던 태권도를 단기간 내에 세계적인 스포츠로 도약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김 부위원장은 지금도 “스포츠하면 과거에는 서양에서 만들어 동양으로 수출하는 것으로만 알았으나 이제는 태권도와 같이 동양에서 서양으로 수출되고 있다”며 “태권도는 우리나라가 세계화에 성공시킨 유일한 종목”이라며 강한 긍지를 가지고 있다.그러나 김 부위원장은 지난 2001년 11월 ‘태권도 협회 스캔들’에 휘말려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전국 태권도학과 교수와 학생, 일선 사범들로 구성된 ‘범태권도 바로세우기 운동연합’이 개혁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는 등 내홍이 심화되자 그는 태권도협회장과 국기원장직을 전격 사퇴했다.하지만 태권도 업계는 대부인 그를 다시 불렀다.

지난해 12월 국기원 이사장 겸 원장으로 선출한 이사회의 결의를 김 부위원장이 수락하면서 그는 사퇴 1년여 만에 다시 친정으로 복귀하게 됐다.태권도계 내홍 사례처럼 감투가 많은 김 부위원장인 만큼 그동안 크고 작은 스캔들도 적지 않았다.이번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무산과 관련한 구설수도 따지고 보면 그의 감투에서 기인한다.평창 유치 무산후 김 부위원장이 IOC부위원장으로 당선된 것이 의혹을 지피는 불씨로 작용했기 때문.“김운용 위원이 자신의 IOC 부위원장 당선을 위해 평창 유치를 막았다”는 한나라당 김용학(강원도 평창) 의원의 이른바 ‘김운용 책임론’ 파문은 일파만파 번지고 있는 형국이다.

특히 평창 유치 지원을 위해 체코 프라하에 머물렀던 고건 총리와 이창동 문광부 장관이 IOC 총회가 열리기 하루 전날 김 부위원장에게 ‘IOC 부위원장 불출마 선언’을 요청했던 것으로 알려져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이와관련 유치단의 일원인 정부측의 한 관계자는 “고 총리의 요청으로 지난 1일(한국시간) 현지의 한 호텔에서 고 총리와 이장관, 김 부위원장의 3자 조찬회동이 있었고, 30여분간 진행된 회동에서 총리와 장관이 김 부위원장에게 평창 유치를 위한 적극적인 협조 차원에서 불출마 선언을 부탁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총리실의 또다른 관계자는 “김 부위원장의 불출마가 평창 유치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해 정부 당국자와 유치위원회측은 수 차례에 걸쳐 그에게 출마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6일 입국한 김 부위원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내가 평창의 동계올림픽 유치를 방해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라며 “평창이 유치에서 탈락하기 전까지는 IOC 부위원장 선거운동을 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그는 또 IOC 부위원장에 출마하게된 계기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IOC 내부사정에다 일부 위원들의 권유가 있었고, 2014년 동계올림픽 유치와 태권도를 보호하기 위해 부위원장직에 출마하게 됐다”고 답했고, IOC 부위원장 출마가 평창 유치에 피해가 됐다는 주장과 관련해서는 “이는 한국적인 생각이다. IOC 안에서 후보도 아닌데 그런 얘기를 하면 나를 추종하는 위원들이 떨어져 나가 결과적으로 평창 유치에 더 도움이 안 됐을 것이다”라고 해명했다.김 부위원장의 이러한 해명에도 불구하고 여론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특히 평창 유치를 학수고대했던 강원도민들의 비난이 고조되고 있다.강원도 의회를 비롯한 체육인, 시민단체 등 강원도민들은 일제히 성명을 발표하면서 김 부위원장의 명확한 입장 표명 및 공직 사퇴를 촉구하고 있다.강원도 의회는 성명서에서 “김 부위원장은 조금이라도 의혹이 있다면 즉각 사퇴하고 강원도민에게 백배 사죄하라”고 촉구했고, 강원도 체육인들도 성명서를 통해 “개인의 영달을 위해 국가 대사를 훼방한 김 부위원장은 국민 앞에 사죄하는 것은 물론 국회의원직과 IOC위원·세계태권도연맹 총재직 등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라”고 주장했다.또 평창동계올림픽을 유치했을 경우 주 경기장 시설이 들어설 예정이었던 평창 도암면 횡계리 일대에는 김 부위원장의 공직사퇴 등을 요구하는 플래카드가 곳곳에 내걸리는 등 지역민들의 비난여론은 더욱 고조되고 있는 실정이다.국제 스포츠계의 거물로 한국 스포츠 외교를 개척해 온 김 부위원장이 이번 ‘평창 스캔들’에 어떻게 대처할지 향후 그의 행보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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