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탐구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천재급 인력 확보에 남다른 욕심 … 세계 고급 두뇌 ‘모시기’진력10년전 신경영 역설 때처럼 최근 ‘천재론’도 큰 사회적 파장 야기“천재 발굴도 중요하지만 천재 탄생시킬 수 있는 토양 조성도 필요” 강조<사진1>이건희 회장의 경영론이 화제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년전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자’며 ‘신경영론’을 펼쳤을 때도 화제가 됐다. 당시만 해도 경기가 지금처럼 나쁘지는 않았다. 삼성은 그때도 역시 지금처럼 잘 나갔다.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론은 ‘잘 나가는’ 사람의 긴장이 역력한 ‘채찍질’이라는 점에서 영향이 재계 전체로 확산됐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렀다.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느냐, 이대로 좌초하느냐가 국가경제적 화두가 되고 있는 시점에서 그는 이제 ‘천재’를 얘기한다. 한 사람의 천재가 삼성을, 더 나아가 국가를 먹여 살리고 이끌어갈 수 있다는 게 그의 믿음이다. 이건희 회장이 원하는 천재란 과연 어떤 모습일까?이건희 회장이 그토록 갈구하는 천재는 이 말 한마디로 정의된다. ‘10만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사람’. 한 사람의 천재가 그만한 인력을 대체할 수 있고, 천재로 인해 10만명에게 노동의 기회가 제공되는 것이다.이건희 회장 눈에는 아직 국내에는 성에 찰만한 천재는 보이지 않는 듯하다. 천재론을 설파할 때면 유일하게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 회장만을 예로 든다. 빌 게이츠가 소프트웨어 하나를 개발하면 1년에 수십억달러를 벌어들이고 수십만명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삼성은 이건희 회장이 인정하는 천재가 삼성 내에는 없다고 말한다.

다만 준(準)천재급 인력이 500여명에 달할 뿐이라고 아쉬운 소리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는 국내 어느 기업에서도 확보하지 못한 특급 인력들이다. 극소수의 천재를 골라내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인재라는 인재는 모두 ‘모셔온’ 덕분이다.이건희 회장은 CEO들을 인사평가 할 때 100점 중 40%를 인재확보 능력에 할애한다. 우수 인력 확보 자체가 이미 경영이라는 점을 주지시키기 위해서다. 천재급 인력 확보에 혈안이다보니 타 재벌과 크고 작은 마찰을 빚기도 한다.그러나 덕분에 삼성은 많은 수확을 거두고 있다. 천재 또는 천재급 인력 확충의 중심이 되는 삼성전자의 실적을 보자. 지난해 40조원 매출에 7조원대 순이익을 올렸다. 또 올해 1/4분기에도 1조원대 이익 행진을 이어갔다. 삼성전자는 영업이익 대부분이 고스란히 순이익으로 반영되는 초우량 경영의 상징적 모델이다.

여기에는 무차입경영 전략과 함께 인재 중시 경영이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은 물론이다.이건희 회장의 천재론은 그러나 최근 LG그룹 구본무 회장의 CEO양성론의 도전을 받기도 했다. 천재는 조직 내 왕따를 불러올 수 있고 조직의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게 구 회장의 우려다. ‘인화’를 기업문화로 강조하는 LG로서는 다소 이질감이 느껴질 수도 있는 부분이다.그러나 삼성은 자타가 공인하는 시스템 경영 기업이다. 철저히 정보와 전략, 효율성에 의해 움직인다. 삼성 특유의 경영 시스템은 꼭 들어맞는 톱니바퀴와도 같다. 이 시스템은 삼성을 움직이고 국내 재계와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이것은 지나친 비약이 아니다. 10년전 이건희 회장이 신경영을 외치며 7·4제(7시 출근, 4시 퇴근)를 실시했을 때, 재계에는 조용한 동요가 시작됐다. 그러면서 하나둘 이 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물론 여기에 편승한 기업들의 직원들은 볼멘 소리를 했다. 또 삼성과 이건희 회장에게 강박관념의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음은 대기업 H사의 한 고위 경영진의 말.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은 고 이병철 회장의 경영방식과 부분 맞닿은 것이었다. 때문에 삼성에는 충격파라고 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한국 기업의 문화와는 상당한 이질을 보였던 게 사실이다”라고 말한다. 그의 말은 이어진다. “삼성이 한다고 너도나도 따라 하다보니 일부 기업은 오히려 부작용을 초래하는 곳이 적지 않았다”또 다른 대기업 S사의 고위 임원의 주장은 조금 다르다. “신경영이 2년 남짓 접어들었을 때였던 것 같다. 아시아 신흥국에 상사 주재원으로 파견 나갔던 사람이 현지 분위기에 관한 리포트를 작성해 올렸다. 보고서 내용 중 일부에는 그 나라 기업들이 삼성 신경영의 실체를 물어오는 사람들이 많더라는 것도 포함돼 있었다.”

때로는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이건희 경영론’은 어느덧 국내 경제인들의 표준이 되고 있다. 좀 더 넓게 보면 국가 경영 패러다임으로 자리잡고 있다. 토마스 쿤에 따르면 기존 패러다임은 끊임없이 새로운 가설에 도전을 받게 되고 이와 함께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해 극복되고 대체된다. 10년전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론을 자신의 또 다른 경영론인 천재론이 극복하고 있다. 천재론은 신경영론이 그랬던 것처럼 점차 패러다임화되고 있다.물론 이건희 회장과 삼성이 승승장구해온 것만은 아니다. 혁신을 모토로 전력 질주하다보니 도태되는 부류가 남들보다 빠르게, 많이 발생했고 이들은 조직에서 외면 당했다. 이들은 지금도 삼성의 정책을 비난하고 있다. 또 삼성은 기타 재벌들과 크고 작은 마찰에 시달렸다.

물론 모든 사례마다 전적으로 삼성이 잘못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삼성이 공격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중심은 주변으로부터 둘러싸이는 법. 어느 한 잘못이 노출되면 논쟁거리로 부풀려지고 그만큼 비난의 강도도 높게 마련인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것은 삼성의 위상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그럼에도 이건희 회장은 대학생, 대기업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한 각종 설문 조사에서 번번이 가장 선호하는 CEO로 나타난다. 또 이들은 장래에 닮고 싶은 인물로 이건희 회장을 꼽는다. 재계에 따르면 이들은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단순히 경영인을 넘어 어떤 지도자의 면모를 읽어내기 때문이라고 한다.

상장사 시가총액 83조7,000억원에 달하는 ‘맘모스’ 삼성을 이끌어가려면 이런 점은 어쩌면 필수적인지도 모른다.“인재는 키우는 것만으로는 안된다. 사과나무를 심어야 한다.”지난 6월5일 이건희 회장이 사장단 간담회 후 기자들과 만나 한 얘기다. 천재를 발굴하는 것이 다가 아니라 천재를 탄생시킬 수 있는 조직력을 키워야 한다는 의미다.그의 천재론은 이제 씨앗이 뿌려졌다. 씨앗이 잘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거름도 주고 물도 줘야 한다. 무엇보다 토양을 잘 다져놓아야 할 것이다. 국민소득 2만달러 달성의 키워드는 이 토양 다지기이다. 이건희 회장은 울창한 숲 이후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 토양 위에서 삼성이 달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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