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7년 6월24일 "반탁 투쟁 위원회 결성"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처칠 영국 총리, 그리고 소련의 스탈린이 모스크바에서 한반도 신탁통치를 결정한 지 1년 반이 지난 1947년 6월24일. 백범 김구선생을 중심으로한 민족주의 세력은 신탁통치 반대와 대한민국의 완전하고도 즉각적인 독립 등을 요구하면서 반탁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백범 김구 등 민족주의 세력과 보수우익세력은 “독립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며 신탁통치 결사반대를 외쳤다. 박헌영이 이끄는 남로당과 좌익세력은 입장을 바꿔 신탁통치 찬성쪽으로 선회했다. 한반도 신탁통치 문제를 논의한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실을 거두지 못하자 신탁여부등 한반도 문제는 UN으로 넘어가 남한과 북한은 각각 단독정부를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1950년 6월25일 "6·25전쟁 발발"
새벽 4시 북한 인민군은 북위 38도선 지역에서 무력침공을 감행했다. 6·25전쟁의 시작이다. 남한을 무력으로 적화하려는 김일성의 기습남침계획은 오래전부터 소련 스탈린의 전폭적 지원아래 준비돼 왔다. 북한군의 전면공격을 받은 국군은 무기의 열세때문에 패전을 거듭하며 후퇴했다. 북한의 전면남침 소식을 들은 미국의 트루먼대통령은 UN안전보장이사회의 긴급소집을 요구하고 미국의 한국전 참전결정을 내렸다. 전쟁발발 나흘 뒤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열린 UN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군파병을 결정했고 16개 나라 30만명으로 구성된 유엔군이 한반도에 투입됐다. 전쟁이 일어난 지 80여일이 지난 9월 15일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전개했다.9월 28일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수복하고 38선을 넘어 북진길에 올랐다. 압록강까지 진격한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했다. 2년 반 동안의 휴전회담 끝에 1953년 7월 27일 북한 공산군측과 유엔군측 사이에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6·25전쟁은 막을 내렸댜. 6·25전쟁을 통해 150만명이 숨졌고 360만명이 다쳤다.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 피살 "
한평생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백범 김구 선생! 1949년 오늘 집무실인 경교장에서 육군 포병소위 안두희에 의해 암살됐다. 상해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했고 광복후 남한만의 단독 정부수립에 반대하며 완전한 통일민족국가 건설을 주장한 민족주의자 백범 김구 선생은 단독 정부수립에 찬성하는 이승만과 결별하고 신탁통치 결사반대와 자주독립 정부수립을 외치며 맹렬한 반탁운동을 전개했다.

1984년 6월27일 "88올림픽 고속도로 완공"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고 14년이 지난 1984년 6월27일. 대구와 광주를 잇는 88올림픽 고속도로가 완공됐다. 길이 175.3km 너비 13.2m의 88올림픽 고속도로는 총 공사비의 2천 39억원 착공 33개월만의 완공이다. 전구간 2차선으로 국내 첫 콘크리트 포장도로다.

1995년 6월29일 "삼풍백화점 붕괴"
초여름의 더위가 기숭을 부리던 이날 서울 강남의 최고급 백화점 가운데 하나인 삼풍백화점이 요란한 굉음을 내며 거짓말처럼 내려앉았다. 지상 5층 지하 4층의 현대식 건물이 10여분 만에 무너져 버린 삼풍백화점 주변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숨진 사람은 모두 502명. 또 937명이 다치고 30명은 시신조차 찾지 못한채로 실종 처리됐다. 엄청난 인명피해를 낸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의 원인은 설계와시공, 감리의 부실 그리고 행정기관의 감독 소홀 등 총체적인 부실로 밝혀졌다. 삼풍백화점 공사관계자들은 증축공사를 하면서 옥상의 대형 냉각탑 3개를 무리하게 옮겼다. 또 옥상을 받친 기둥속의 철근은 설계의 절반수준인 8개씩밖에 들어가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5층 롤러스케이트장을 식당가로 무리하게 용도변경해 하중이 엄청나게 늘어난 것도 붕괴의 한 원인으로 밝혀졌다. 건물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은 부분도 문제점으로 드러났다. 고도성장에 가려진 사회 전반의 안전불감증으로 발생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건국이래 최대의 인명사고로 기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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