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 남쪽 기슭에 있는 네팔은 지정학적으로 인도와 중국 사이에 끼어 있는 전략 요충지이다. 우리나라 국민이 네팔에 대해 가진 인상은 ‘가난하지만, 행복한 나라’이다. 그러나 최근 성난 네팔 시위대는 대통령 관저, 총리실, 정부 청사 등 주요 시설을 방화하고 교도소를 급습해 수감자 900명 가량이 탈옥하도록 도왔으며, 무능과 부정부패로 민생을 도탄에 빠뜨린 네팔 친중 정권을 몰아냈다.
네팔에서는 권력층의 부패, 청년실업, 경제난, 일대일로 사업 부실에 따른 부채 급증 등으로 국민 불만이 누적됐는데, 정부의 SNS 차단 조치가 청년층의 분노를 촉발했다. 네팔 청년들의 실업률은 21%로 전 세계 평균보다도 높다. 해외에 나간 네팔 근로자 220만 명이 본국으로 송금하는 돈이 네팔 국내총생산(GDP)의 4분의 1에 달한다. ‘송금 경제’로 유지되는 네팔에서 SNS는 국외 근로자와 국내 가족을 연결하는 중요한 소통 수단인데, 그런 SNS를 차단하자 권력층의 부패에 대해 켜켜이 쌓여 있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지난 몇 년 사이 남아시아 지역의 불평등 시위는 도미노 현상처럼 이어졌다. 2022년 스리랑카는 시위대가 코로나19를 겪으며 국가부도 상황을 초래한 대통령궁을 점거하자 라자팍사 대통령은 즉시 사임했다. 지난해 방글라데시에서는 재벌 부패와 부자 감세가 겹쳐 정권 붕괴를 촉발했다. 올해 8월 인도네시아에서는 의원들이 최저임금의 10배에 달하는 주거 수당을 챙겨온 사실이 드러나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최근 필리핀에서도 홍수 방지 사업 부패 스캔들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이 같은 (동)남아시아의 반정부 시위에는 공통점이 있다. 높은 청년 실업과 부패한 권력에 분노한 ‘젠지(GenZ·Z세대, 1990년대 중반 이후 출생)’가 시위를 이끈 주축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 사태가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육·해상 실크로드) 전략 실패와도 직결된다는 사실이다. 네팔, 스리랑카, 파키스탄 모두 중국 차관과 인프라 투자의 덫에 걸린 국가들이다. 달콤한 차관 뒤에 숨겨진 채무 함정이 드러나자, 경제 위기는 곧 정치 위기로 이어졌다. 남아시아 시민 혁명의 불길은 중국식 개발 모델의 허상을 폭로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번 네팔 사태가 도화선으로 작용해 역내 친중 정권 붕괴가 도미노 현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파이낸셜타임스(FT)가 진단한 남아시아 청년들의 분노엔 ①높은 청년 실업률 ②부(富)를 독점한 정치 엘리트 ③고질적인 부패 문제가 깔려있다. 좌파 진영은 흔히 불평등 문제를 단순히 분배의 실패로만 규정한다. 그러나 분배 이전에 더 중요한 것은 지속 가능한 경제성장과 국가경쟁력 확보이다.
인구 3천만 명의 베네수엘라에서는 지난 2016년 이후 560만 명이 나라를 떠난 상태이다. 분배만을 강조하다가 경제가 붕괴한 베네수엘라와 네팔 사태가 아시아에 던지는 메시지는 “성장 없는 분배는 모래성”이라는 사실이다.
네팔 사태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 첫째, 좌파적 포퓰리즘은 국가를 쇠망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무상 복지와 인기 영합 정책으로는 결코 국가를 유지할 수 없다. 둘째, 국가 자강(自强) 전략을 확고히 해야 한다. 정치 안정과 사회 통합은 흔들려서는 안 될 국가의 바탕이다. 셋째, 안보와 동맹 외교 전략의 강화이다. 한국은 미·중 패권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원칙 있는 자유민주 동맹을 견지해야 한다.
기존 질서가 더 이상 사회적 요구와 모순을 감당하지 못할 때 ‘대변혁의 전조(前兆)’가 나타난다. 이 징후가 누적되고 외부 충격과 맞물릴 때, ‘대변혁’이 폭발하게 된다. 프랑스 혁명(1789), 러시아 혁명(1917) 등이 그러했다. 지난 2010년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의 독재국가와 군주국들에서 반정부 시위와 정권 전복 기도가 연쇄적으로 일어났던 ‘아랍의 봄’(Arab Spring)이 있었다. 역사는 반복된다. 네팔 사태는 아시아 전체가 직면한 거울으로, ‘아시아의 봄’ 물결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대한민국은 절정기와 쇠퇴기가 겹친 변곡점에 서 있다. 이럴 때일수록 위기관리가 필요하다. 경제적 불평등은 우리 사회에서도 정치·사회 갈등의 뇌관이다. 세계불평등연구소(WIL)는 지난해 1월 보고서에서 “한국의 경제적 불평등 수준이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나빠져 2020년 현재 1930년대 일제 강점기 수준에 근접했다”고 경고했다. 한미 관세협상 여파로 국내 투자가 크게 위축될 수 있다. 이러한 우려는 청년층에 ‘일자리 불평등’이라는 불안을 안길 수 있다. 남아시아의 대변혁 도미노 현상이 우리에게는 국정 전환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
일요서울 논설주간 우 종 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