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는 대한민국의 원형이 탄생한 곳으로, 현대 한국인 DNA의 근간이며, 위대한 문명으로 가득 찬 세계적인 역사 도시이다. 최초로 통일국가를 이룬 신라는 천년에서 8년이 모자라는 992년(기원전 57~935)을 존속하여 세계에서 두 번째로 역사가 긴 국가이다. 신라보다 역사가 긴 국가는 1천58년(395~1453)을 존속한 동로마(비잔틴)제국뿐이다.

세계적인 고고학적 가치를 지닌 신라금관에는 불멸을 꿈꾸었던 고대인들의 영원한 욕망이 새겨져 있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최초의 실크로드, 8천㎞가 넘는 광활한 유라시아 초원길은 북방 유목민족들이 인류문명을 동서로 나르던 황금길이기도 하다. 초원길은 찬란한 황금문화를 전파해주었고, 카자흐스탄과 몽골초원을 지나 만주를 거쳐 이 길의 종착지였던 경주는 세계적인 ‘황금문명’을 꽃피울 수 있었다. 신라는 초원과 사막, 바다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끊임없이 세계와 교류한 글로벌 제국이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의 수도 서라벌에는 금으로 장식한 금입택(金入宅)이 30여 채에 이르고, 사찰의 수가 200여 개소가 넘었으며, 가구 수가 17만 8,936호(1호를 5인으로 잡으면 90만 정도의 인구)로 나온다. 이에 비춰볼 때 8세기 때 신라의 서라벌은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이나 당나라의 장안(長安), 이슬람제국의 바그다드와 함께 세계 4대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대한민국 민족문화의 원형은 ‘3대 경북문화’와 ‘4대 경북정신’으로 고스란히 응축돼 있다. 경주 불교문화, 안동 유교문화, 고령 대가야문화의 ‘3대 경북문화’와 화랑정신, 선비정신, 호국정신, 새마을 정신의 ‘4대 경북정신’이 그것이다. 이것은 모두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으로 연결되고 있다.

천년 고도(古都) 경주가 세계 외교사의 주 무대가 되었다. 10월 31일 APEC 정상회의가 열리며, 미·중 정상이 나란히 방한하는 역사적 장면이 연출된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지난 25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회동으로 벌써 세계의 이목은 경주로 향하고 있으며, 두 정상의 만남으로 경주 APEC 정상회의는 더욱 특별해졌다”며 “전 세계에 감동과 희망을 전할 수 있는 역대 최대의 행사가 되도록 남은 기간 최선을 다하자”고 당부했다.

지금 세계 질서는 미·중 패권 경쟁이 격화되는 불안정의 시기이다. 미국은 우리의 혈맹이자 안보의 버팀목이고, 중국은 최대 교역국으로서 경제적 현실과 직결된다. 이 두 정상이 동시에 경주에 온다는 사실은, 한국 외교의 전략적 중요성을 단적으로 증명한다. 바로 그렇기에 이번 APEC 정상회의는 “국익 실현의 경연장”이라 할 수 있다.

이번 경주 APEC에서 우리 정부는 튼튼한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실용적 대중 외교를 통해 국익을 극대화해야 한다. 냉철한 현실 인식 속에서 공급망·에너지·AI 규범과 같은 미래 어젠다를 주도해야 한다. 반도체, 배터리, 원전 등 전략 산업은 한국 경제의 심장부다. 미국과는 기술동맹, 방위산업 협력을 강화하되, 동시에 중국과는 무역 및 공급망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균형이 필요하다. 강대국 사이에서 흔들리지 않는 실용 외교야말로 우리 외교의 올바른 길이다.

이번 회의의 개최지인 경주가 갖는 상징성은 실로 크다. 신라인들은 호국불교의 상징인 불국사, 세계 유일의 인조석굴인 석굴암, 신라의 꿈이 담긴 황룡사구층탑, 천년 궁성 월성(月城), 동아시아 전통 우주론이 깃들어 있는 첨성대 등 숱한 세계적인 문물을 창조했다.

이러한 문화유산은 “천년 지속 가능 국가경영”의 상징이며, 세계 정상들에게 한국의 문화적 저력을 각인시킬 귀한 기회다. ‘경제강국’을 넘어 ‘문화강국’으로서의 대한민국의 ‘소프트 파워’를 제대로 보여줄 때, 우리의 국격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다. 과거 신라가 해상과 육상의 교역로를 통해 동아시아 문명을 주도했듯, 오늘의 대한민국도 양대 세력 균형의 ‘가교역할’을 해야 한다.

이번 경주 APEC은 기회이자 도전이다. APEC 정상회의가 ‘미·중 진영 갈등의 최전선’이 될 위험도 크다. 치밀한 전략과 완벽한 준비를 통해 APEC 정상회의 의장국인 한국이 미·중의 화해 계기를 만들어 20여 개 회원국 입장을 반영한 ‘경주 선언’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길 바란다.

미국과 중국이 각자의 세계전략을 관철하려 하겠지만, 한국은 국격을 높이는 ‘다자 외교’, 국익을 지키는 ‘실용 외교’를 펼쳐야 한다. 경주 APEC은 외교의 지평을 넓히고, 안보와 경제, 문화와 가치 외교를 아우르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어야 한다. 경주 시민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성숙한 국민의식이 이번 APEC 성공의 열쇠다.

 

일요서울 논설주간 우 종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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