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종로의 한 복지관 강당. “우리 세대도 이제 목소리를 낼 때가 됐어요”. 손에 투표 안내문을 쥔 김정애 (68, 가명) 씨가 또박또박 이같이 말했다. 그는 평생 ‘조용한 유권자’로 살아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태도가 달라졌다. “연금 문제나 의료비 같은 게 결국 정치 아닌가요? 젊은 사람들만 나라 걱정하는 게 아니죠”.
-“실버세대의 표심이 바뀌고 있다”
- 복지에서 참여로...깨어나는 60+유권자
- 표의 힘 아는 세대, 실버의 정치 시작됐다
[일요서울ㅣ현성식 객원기자] 최근 한국 사회의 인구지형이 급격히 변하면서 유권자 지형 역시 조용히 요동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4년 말 기준으로 65세 이상 인구가 1024만 명을 넘어서면서 주민등록 인구의 20%를 최초로 돌파, 이 추세대로라면 오는 2050년엔 전체 인구의 40%를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60대 이상 유권자 전체 34% 달해....10년안에 50% 육박
이미 60세 이상 유권자는 전체 유권자의 34%에 달한다. 향후 10년 안에 절반에 근접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이런 가운데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힘’으로 남아 있다. 투표율은 높지만 목소리는 조용하다. 사회적 관심은 청년층에 쏠리고, 정치권의 공약은 종종 ‘노년 표심 잡기’식 복지성 공약으로 흐른다는 분석이다.
이른바 ‘실버세대’는 단순한 복지 수혜층이 아니다. 경제·사회적 기반을 갖춘 ‘골드세대’로서 지역사회와 국가정책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거대한 유권자 집단이다. 이 조용한 거인들이 어떻게 정치의 새로운 주체로 부상하고 있으며, 또 어떤 한계와 가능성을 안고 있는 것일까.
지난 8월 경기도 김포시에서 개최한 한 시니어 일자리 박람회. 이른 아침부터 행사장 입구에는 50~70대 이르는 나이대 수백 명이 길게 줄을 섰다. 취업정보 게시판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는 이도 있었고, 상담 부스에서 이력서를 내는 이들도 있었다.
“요즘 정치인들, 시니어표 얻으려고 쉼터 위주로 돌죠. 그런데 진짜 필요한 건 ‘일할 수 있는 자리’예요.” 전직 공무원 출신 이성호 씨(68, 가명)는 단호히 말했다. 그는 퇴직 후 5년째 지역의 복지관에서 재취업 상담을 돕고 있다. “시니어층에게는 단순한 현금성 지원보다 ‘존재감’이 중요합니다. 내가 여전히 사회에 필요하다는 확신, 그걸 주는 게 진짜 정치 아닐까요.”
박람회 현장에서는 은퇴자들의 목소리가 유난히 현실적이었다. “교통비, 식비도 부담이지만, 사회와 단절되는 게 더 무섭다”는 말이 곳곳에서 들렸다. 이날 행사장에는 지방의원 몇 명이 홍보 겸 방문했지만, 참가자들은 냉정했다. “선거철에만 찾아오는 사람들 말은 이제 믿지 않아요. 정책으로 보여줘야죠”.
최근 한 조사기관에 따르면 60세 이상 응답자 중 60% 넘게 “정치에 관심이 있다”고 답했다. 20~30대보다 오히려 높은 수치다. 또 투표 외에도 60세 이상 연령층은 디지털 미디어 이용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경향이 있으며 네트워크와 사회 응집력이 높을수록 정치 참여도가 더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60대 이상 응답자, 60%이상 “정치에 관심이 많다”
하지만 정당 지지율은 뚜렷한 세대별 편향을 보이지 않는다. 중도나 무당층이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즉 “실버세대의 표심은 조직화되지 않은 잠재적 변수”라는 분석이 가능하다. 관련 전문가들은 “한국의 고령 유권자는 단일 집단이 아니다”라며 “경제·사회적 격차가 세대 내부에서도 크기 때문에 ‘노인=보수층’이라는 프레임은 이미 낡았다. 앞으로의 정치권은 이 세대 안의 다양성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정치권의 ‘노년 친화정책’은 늘 논란의 대상이다. 복지 확대라는 명분 아래 실제로는 선거용 포퓰리즘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노인 지하철 무임승차 제도의 경우가 대표적 사례다. 도입 40년이 넘는 대표적인 노인 복지 정책이지만, 최근 재정 적자 문제로 인해 연령 상향 또는 개편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세대 갈등의 상징이 됐다.
이와 관련해 전문가들은 “이제는 세대별 복지 경쟁이 아니라 세대 간 연대를 위한 정치로 나아가야 한다”며 “노인 복지를 강화하자는 말과 청년 세대의 부담을 줄이자는 말이 대립 구조로 소비되고 있다. 그러나 결국 세대 간 갈등은 사회 전체의 신뢰를 무너뜨린다. 고령 유권자가 ‘포용적 정치문화’의 중심이 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의정부시의 경우 지난 2023년 7월부터 ‘시니어 위원회’를 운영 중이다. 시는 60세 이상 노인 및 복지, 교육, 의료, 일자리 등 다양한 분야에서 경험과 전문성을 갖춘 인사들로 시니어위원회를 구성해 시정의 방향성과 노인복지 증진 사업에 대한 심의‧자문을 받고 이를 시정에 반영하고 있다.
지난 9월 회의에서 시니어위원들은 “의정부시가 초고령사회 진입을 앞두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어르신 복지와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정책 마련과 실행에 있어 중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하며, 경로당 활성화와 북한이탈주민 지원, 시니어 특화 프로그램 운영 등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는 등 정책수립에 참여하고 있다.
시니어위원회는 2022년 7월 처음 구성돼 현재까지 정기회의 3회, 임시회의 3회, 간담회 3회, 노인복지 현장 방문 4회를 진행했다. 이를 통해 총 12개의 시책을 발굴했으며 실제 이 가운데 폐지 줍는 노인 지원, 노인 대상 디지털 신종범죄 대응 교육 강화, 기억력 문제 노인을 위한 인식표 보급 등 5개 사업이 시정에 반영됐다. 주위에선 “이런 작은 공론장이 고령사회 정치문화의 변화를 보여주는 신호탄”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실버세대 정치력, ‘세대통합정치’를 위한 관문 역할
실버세대의 정치력 강화는 단순히 노년층의 권리 문제가 아니다. 청년층과 중장년층, 은퇴세대가 함께 사회의 방향을 논의하고 조율하는 ‘세대 통합 정치’로 나아가기 위한 관문이다. 수원 지역에서 시민참여단 활동을 하는 정호연 씨(65, 가명)는 “우리가 청년 때는 ‘노인정치’라는 말 자체가 없었다”면서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늙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고, 그 안에서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게 우리 몫”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고령화는 더 이상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조용한 거인들’이 깨어나고 있다. 그들은 단순한 복지 대상이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주체로 부상하고 있다. 정치가 이 거대한 흐름을 ‘표 계산’이 아닌 ‘사회적 자산’으로 인식할 때 세대 간 신뢰와 공존의 정치문화가 가능해진다. 결국 단기적 표심이 아니라 장기적 공존의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는 시각이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