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퇴는 끝이 아니라 또 한 번의 출근이다.” 지난 8월, 서울 성수동의 한 공유오피스에서 만난 62세 이정훈(가명) 씨(전 IT회사 임원)는 노트북을 닫으며 미소를 지었다. 대기업에서 퇴직한 지 4년, 그는 지금 ‘시니어 창업 컨설턴트’로 일한다. “처음엔 낯설었어요. 퇴직 후엔 쉬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죠. 그런데 막상 쉬어보니 하루가 너무 길더군요. 이제는 후배 창업자들과 매일 부딪히며 사는 게 제 두 번째 인생입니다.”
-“퇴직은 했지만 은퇴는 아니다”...일하는 노년, 새로운 시대가 열리다
-‘은퇴 후 노동’의 재발견, 생계서 자아실현으로..5060세대, 다시 일터로
- 정년후 20년, 두 번째 출근 시작됐다..은퇴자들의 새로운 일의 혁명
[일요서울ㅣ현성식 객원기자] 그의 말처럼 5060세대의 은퇴는 더 이상 ‘일의 종착점’이 아니다. 오히려 또 다른 시작점이다. ‘은퇴 후 노동’ 인식이 바뀌고 있다. 고령화 속도 세계 1위, 평균수명 83세. 하지만 한국의 법정 정년은 여전히 60세다. 퇴직 후 ‘평균 20년 이상’의 인생이 남는다. 과거 같으면 ‘노후를 위한 휴식기’였겠지만 이제는 ‘새로운 사회적 역할의 시간’으로 바뀌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60~69세 고용률은 45.2%로 10년 전보다 10%p 가까이 상승했다. 이 가운데 3분의 1은 ‘자발적 재취업’으로 분류된다. 단순히 생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적 소속감과 자아실현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뜻이다.
60~69세 고용률 45.2% 이전보다 10%p 상승
전문가 들은 “5060세대는 산업화 시대를 이끈 주역이지만, 지금은 디지털·서비스 전환 시대에 다시 적응해야 하는 세대”라며 “그 과정에서 ‘일의 의미’를 다시 발견하고 있다”고 분석했다.서울 송파구의 한 IT중소기업 사무실. 이곳에서 ‘품질관리 어시스턴트’로 일하는 64세 김선희(가명) 씨는 2년 전까지만 해도 전업주부였다. “남편이 퇴직하고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니, 저도 일하고 싶더라고요. 직업훈련센터에서 OA자격증을 따고 나니 자신감이 생겼어요.”
김 씨는 현재 하루 5시간 근무하며 월 120만 원의 수입을 얻는다. 그녀는 “경제적인 부분보다도 출근하면서 사람 만나고, 내 역할이 있다는 게 좋다”며 ““퇴직은 신분이 아니라 상황일 뿐이다. 일하는 한 계속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퇴직 후 창업을 택했다는 이정환(67, 가명) 씨는 “은행에서 30년을 일했지만, 늘 ‘나만의 일’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은퇴 후 대구시 시니어창업지원센터에서 창업 교육을 받았다. 지금은 지역 시니어들이 만든 수공예품을 전시·판매하는 플랫폼을 운영한다. 그는 “처음엔 ‘나이 들어 무슨 창업이냐’는 시선이 많았지만, 요즘은 젊은 고객들이 와서 같이 협업하자고 한다”며 “은퇴 후 창업은 모험이 아니라, 경험을 다시 쓰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성남시 한 지역에서는 매주 ‘시니어 리빙랩’이 운영 중이다. 이곳에선 은퇴자 ‘디지털 강사단’의 수업이 열리는데 58세부터 72세까지의 강사 12명이 스마트폰 활용, 온라인 결제, 유튜브 제작 등을 가르친다.
경남 창원시에서는 ‘은퇴 기술자 재취업 매칭센터’가 운영 중이다. 이곳에서는 조선·기계 분야 퇴직 기술자들이 청년 창업기업의 멘토로 활동한다. 또한 창원시는 중장년 은퇴자 인력풀을 구성, 재취업 서비스 등을 제공하고 있다. 시는 재무·인사·생산관리 등 다양한 분야의 은퇴 전문인력이 역량을 펼칠 수 있는 일자리를 찾아 맞춤형 재취업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방침이다.
과거 노년층 일자리는 ‘경비·청소·택배보조’ 등 단순·저임금 직종이 주를 이뤘다. 그러나 최근 3년 사이 이른바 ‘고령친화 직업 생태계’가 빠르게 확산 중이다. 고용노동부 ‘시니어 친화일자리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정부의 전체 노인일자리는 103만 개로 확대됐으며 이 중 사회서비스형 일자리는 약 27만명 규모로 파악된다.
경기도 부천시는 최근 ‘인생이모작 지원센터’를 확대 운영을 시작했다. 이곳은 퇴직자 대상 직업상담, 창업공간, 사회공헌 매칭을 지원한다. 이곳 관계자는 “은퇴자의 일은 단순한 고용이 아니라 사회적 회복이다. 일터로 복귀하면 우울감·소외감이 확연히 줄어든다”며 “노년의 일은 복지이자 예방의학”이라고 말했다.
서울의 한 고용지원센터에서 만난 59세 조성은(가명) 씨는 “퇴직 후 바로 구직활동을 시작했지만 나이로 걸러진다는 게 현실”이라며 “경력은 자산이 아니라 장애물처럼 취급된다”고 말했다.
60세이상 구직자, “적합한 일자리 부족” 하소연
실제 한국노동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60세 이상 구직자의 45%는 “적합한 일자리 부족”을 재취업 실패 이유로 꼽았다. 전문가들은 “단순 공공근로 중심의 ‘숫자 채우기식’ 일자리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경력형, 사회공헌형, 디지털 적응형 등 세분화된 일자리 구조가 필요하다”라고 은퇴자 일자리 정책의 질적 개선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5060세대의 노동은 더 이상 생계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를 움직이고, 세대 간 단절을 메우며 지역 공동체를 지탱하는 힘이다. 이들의 ‘일’은 경제적 가치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은퇴 이후에도 스스로의 경험과 기술을 사회 속에서 다시 순환시키는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이 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60세 이상 근로자의 절반 이상이 “경제적 이유보다 사회적 관계와 성취감을 위해 일한다”고 답했다. 단순히 ‘퇴직자의 복귀’가 아니라, 세대 간 지식과 경험이 다시 사회로 흘러드는 ‘사회적 순환의 시작’인 셈이다.
서울 성동구에서 만난 68세 윤기훈(가명) 씨는 그 변화를 체감하는 한 사람이다. “일이 없을 땐 하루가 너무 길었는데, 지금은 하루가 모자라다”며 웃는 그는 현재 지역아동센터에서 ‘생활지도사’로 활동 중이다. 어린이들과 함께 책을 읽고, 숙제를 봐주며 하루를 보낸다. “내가 사회에 여전히 쓸모 있다는 게 가장 큰 행복이에요.” 윤 씨의 하루는 이제 ‘퇴직 이후의 시간’이 아니라 ‘또 다른 근무일정’으로 채워진다. 일은 그에게 소득 이상의 의미, 이른바 ‘존재의 이유’를 부여한다.
이제 은퇴는 끝이 아니라, 인생의 구조를 새롭게 짜는 ‘두 번째 설계’의 시작이다. 지금의 5060세대는 한국 사회의 첫 ‘초고령화 전환 세대’이자 동시에 ‘일하는 노년 세대’의 개막을 알리는 주역이다. 그들이 선택한 일은 자아를 증명하고, 세대 간 신뢰를 복원하는 사회적 역할로 진화하고 있다. 퇴직 후에도 지역 커뮤니티, 사회적 기업, 공공서비스 분야에서 활약하는 시니어들이 늘고 있는 이유다. ‘일’이 단순한 경제활동을 넘어 사회참여의 통로가 되고 ‘나이듦’이 곧 사회와의 연결고리로 작동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