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민의힘에서 터진 박민영 미디어대변인의 인재(人災)는 우리 정치의 자화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박민영 대변인은 한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자당의 김예지 의원을 향해 장애인을 너무 많이 할당해서 문제라며 시각장애 빼면 기득권 집안”, “약자성을 무기로 삼는다는 식의 혐오 발언을 쏟아냈다. 심지어 김 의원이 발의한 장기이식법 개정안을 합법적 장기 적출이라고 왜곡하며 비난했다. 이에 김예지 의원은 허위사실 유포와 명예훼손으로 박 대변인을 고발했고, 박 대변인 본인도 사의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장동혁 당대표 등 당의 주류는 인재(人才)는 지켜야 한다며 이 사의를 반려했다. 당 지도부가 명백한 혐오 발언조차 정치적 유불리와 계파 갈등의 재료로만 다루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 과정은 당 주류와 한동훈계 간의 세력다툼이 상식 범위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을 증명한다.

정치가 원래 그런거려니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런 광경을 이미 백년 전에 설명한 사람이 있다. 바로 20세기 독일 정치철학자 칼 슈미트(Carl Schmitt). 슈미트는 1932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 정치의 본질을 친구와 적의 구별로 규정했다. 그는 도덕에서의 구별이 선악이고, 미학에서는 아름다움과 추함, 경제에서는 이익과 손해인 것처럼 정치의 고유한 구별은 오직 친구(friend)와 적(enemy)이라고 단언했다. 여기서 적이란 도덕적으로 악하거나 경제적으로 해로운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본질적으로 다르며, 극단적인 경우 생존을 건 투쟁의 대상이 될 수 있는 타자일 뿐이다. 반대로 친구는 우리의 정체성을 공유하고 신뢰할 수 있는 내부 집단이다. “우리(친구)”로 규정하는 공동체와 타자()”로 간주하는 외부세력을 구분하는 일이 정치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1933년 이후 그가 나치 정권에 협력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 실제로 슈미트는 나치 치하에서 의회 제도를 폐지하고 일당 독재를 정당화하는 법논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몇 년만에 정권 내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영향력을 잃고, 전후에는 나치에 부역한 전력 때문에 학계 주류에서 배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미트는 죽는 날까지 자신의 정치관을 철회하지 않았고, 말년에도 서구 자유민주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써서 끝내 반성 없는 보수 혁명가로 남았다.

우리 현실 역시 슈미트가 진단한 정치의 병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진보와 보수 간 대립은 기본이고, 이제는 같은 진영 내부에서도 사소한 의견 차이, 팬덤 갈등, 세대 갈등이 적대를 낳는다. 팬덤 정치와 유튜브 알고리즘, 공천을 둘러싼 내부 경쟁이 서로를 더 순수한 우리배신자로 갈라세우는 구조를 만들어놓고, 그 위에서 개인의 막말이 폭주하고 있다. 박민영-김예지 사건은 그 축소판이다. 같은 당 내 상대를 으로 규정하고 제거하려 드는 모습을 슈미트라면 이것이 정치의 본질이라고 할지 모른다. 공천이라는 당내 권력투쟁이 먼저라면, 가장 먼저 적이 되는 것은 바깥의 상대가 아니라 바로 옆에 서 있던 동료가 되기 때문이다.

이번 사안을 단순한 당내 갈등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 한국의 진영 정치에서 반복되는 전형적 패턴이기 때문이다. 국민의힘은 과거 친박과 비박, 윤핵관과 이준석 등 되풀이되는 당 내 적대적 대립으로 지리멸렬해져 버렸다. 비슷한 일은 또 다른 진영에서도 반복되어 왔다. 친노와 비노, 친문과 친명 등 진보든 보수든, 상대를 적으로만 보는 정치가 결국 자기 진영의 토대를 갉아먹는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이제 슈미트의 친구-적 프레임을 넘어설 때다. 슈미트는 현실 정치를 날카롭게 지적했지만, 그가 드러낸 정치의 덫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민주주의의 이상이 될 수는 없다. 이 덫에서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는 우리 시대의 과제다. 타협과 대화, 관용의 정치를 회복하지 않으면 국민 전체가 정치 자체를 적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 스스로 공동체를 무너뜨릴지 모른다. 적보다 더 많은 친구를 찾을 때 우리 공동체는 더 강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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