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급 약세 원화... 외환시장 ‘구조 리스크’ 현실화되나
[일요서울 l 이지훈 기자] 원·달러 환율이 1500원 고지를 눈 앞에 두고 있어 시장에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최근 실질실효환율(REER)마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원화의 국제적 구매력이 급속히 훼손되고 있다는 우려가 시장 안팎에서 확산하는 모양새다.
-실질가치 16년 만 최저... ‘저평가 원화’ 장기화 우려
-정부·국민연금·대기업 총동원 “일단 급한 불은 껐지만...”
지난 23일 한국은행과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10월 말 한국의 실질실효환율 지수는 89.09로, 전달 대비 1.44포인트 하락했다. 국내 정치 불확실성이 최고조였던 올해 3월보다도 더 낮은 수준으로, 2009년 금융위기 직후(88.88) 이후 약 16년 만의 최저치다. IMF 외환위기(86.63) 시기와 비교해도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통화 가치가 기준점(100) 대비 낮게 평가되고 있다는 의미다.
특히, 64개 BIS 통계국 가운데 한국의 실질실효환율은 일본·중국에 이어 세 번째로 낮았다. 문제는 이달 들어 원·달러 환율 상승 속도가 더 빨라지면서 실질 가치 하락이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실제로 환율은 지난 21일 장중 1476원까지 오르며 올해 4월 ‘미·중 관세 충돌’ 우려가 극대화됐던 당시 고점(1487원대)에 근접했다. 단기 급등에 그쳤던 4월과 달리 최근 흐름은 상승·조정을 반복하며 추세 상향을 형성하고 있다는 평가다.
이 같은 고환율 흐름에 외환당국과 국민연금이 처음으로 ‘4자 협의체’를 꾸려 대응에 나섰다. 기획재정부·보건복지부·한국은행·국민연금이 모여 비공개 첫 회의를 연 것으로 확인됐다. 외환시장 대응을 위해 국민연금이 공식 협의에 참여한 것은 사실상 처음이다.
국민연금의 해외 투자 과정에서 발생하는 대규모 달러 수요가 최근 환율 상승 압력을 강화하고 있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국민연금은 전체 기금 1322조 원 중 약 58%를 해외 자산에 투자하고 있다. 달러 가치가 오르면 보유 달러를 내놓고, 반대로 달러 가치가 떨어지면 매수하는 전략을 쓰는데, 이 과정이 외환 수급 변동성을 키우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돼 왔다.
정부는 “기금 수익성과 시장 안정을 조화시키는 방안을 찾겠다”고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달러 매도 확대(전략적 환헤지) ▲해외주식 비중 조정 ▲한은과의 외환스와프 연장·확대 등이 논의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대기업에도 외환 수급 안정 기여를 요청하고 있다. 최근 구윤철 경제부총리가 삼성전자·SK하이닉스·현대차·기아 등 주요 수출 기업과 만나 “달러 수급 개선에 협력해 달라”고 주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수출대금을 환전하지 않고 쌓아두는 관행이 고환율을 장기화하고 있다는 지적 때문이다.
다만 국민연금을 사실상의 ‘환율 안정 도구’로 활용하는 데 대해 우려도 만만치 않다. 기금의 독립성과 장기 수익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원화 가치 약세가 단순한 환율 종목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자본 흐름·정책 불확실성·글로벌 위험 회피 심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분석한다.
본지와 이야기를 나눈 경제학 전문가는 “실질실효환율이 장기간 낮게 유지되면 수입 물가 상승→기업 비용 증가→내수 둔화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발생할 수 있다”며 “단기 미봉책보다 중장기 외환 구조 개편 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25일 미국 금리 인하 기대감 확산되면서 환율은 오전 10시11분 현재 전일 주간 거래 종가(오후 3시30분 기준)보다 2.2원 내린 1473원이다. 미국연방준비제도 금리 인하 기대감이 달러에 약세 압력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외환당국이 환율 안정 의지를 밝히고 있는 점도 환율 상승을 억제하는 것에 영향을 준 것으로 분석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