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렴 비서실장, 고양이 목에 방울 달아 명비서실장으로 통해황제 대통령’박정희 <3>

박통과 부패, “너도 내가 살아있을 때 앞가림이나 해”<3>
상대적이겠지만 박대통령은 개인적 부패 스캔들이 크게 드러난 것이 없는 편이지. 하지만 이것도 당시의 권력자 주변의 ‘통행금지령’을 감안해 본다면 부패가 없었다기보다 웬만한 건 그냥 넘어가거나 덮여 버린 탓도 있다고 볼 수 있어.그는 이미 사회가 많이 부패해 있고 자신의 주변도 예외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어.경제비서관 H씨는 그런 대로 유능했던 참모였어. 하루는 이 양반이 대통령에게 꽤 두툼한 결재서류를 들고 들어간 일이 있어. 설명을 들으며 이리 저리 서류를 훑어보던 대통령의 낯빛이 변하는 게 아니겠어. H씨는 긴장했지. 잠시 예의 날카로운 눈매로 쏘아보더니 “이건 뭐야?!”하고 봉투를 하나 던지는 게 아냐.깜짝 놀랐지. 아차, 실수. 뇌물 봉투 하나가 서류철에 붙어 들어간 거야.

그 사건이 있었지만 박대통령은 아무런 문책도 없었다고 해. 상당한 기간 후 개각을 단행하며 비서진을 개편할 때 H비서관이 보따리를 싸고 나서야 그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수첩에 적어 놓았다가 목을 베었다는 얘기가 나돌았어.집권 말기에는 본인도 상당히 자포자기하는 면을 보여 주었다고 해.한 ‘심야행사’에 대통령을 모셨던 경호책임자는 대통령과 이런 대화를 가졌다고 해.“너, 돈 많이 벌었지?”“아닙니다. 각하 모시느라고 저는 돈 못 모았습니다.”“임마, 모르는 줄 알아도 내가 다 알아. 바깥에서들 많이 해 먹고 있다는 얘기 다 알고 있어. 너도 아직 내가 살아있을 때 앞가림이나 해.”이보다는 완곡했는지 더 직설적이었는지 그건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때로 권력자와 주종적 관계의 사회에서는 다운 그레이드 된 대화가 얼마든지 소통된다고 해. 어떻든 박대통령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어떤 예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듯 싶었으며 주변의 부패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이르고 그것을 다잡아야 할 자신의 힘마저 이미 만들어진 틀에 의해 허물어지는 것을 알고 있었던 듯 싶어.

독재권력을 호랑이 등에 탄 형국으로 묘사하지. 내려 왔다가는 호랑이에게 잡혀 먹히는 상황이니 끝장날 때까지 달리는 거지. 박대통령에게도 이런 측면이 없지는 않았으리라는 짐작이야. 하지만 그래도 ‘조국 근대화’하고 ‘군 본연의 자세로 돌아간다’던 삶이고 보면 그래도 고민이 있었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돼. 이제 물러나야 국가와 민족에 도움이 되지 않겠나 하는 선택의 고민 말이야.세상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이런 에피소드가 있어.대통령의 스피치 라이터를 지낸 모씨를 하루는 대통령이 조용히 불렀어. 1970년대 중반이라고 해.“자네, 한 가지 일을 맡아 주어야겠네. 내일부터 내가 한 연설문 담화 지시사항 그리고 각 현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수집해 줘. 특히 고속도로 지도 위에 그린 그림 같은 것들도 말야. 조용히 드러나지 않게.” ‘아, 대통령이 은퇴를 준비하시려는구나.’지시를 받아들면서 그는 어떤 예감이 떠오르더라는 거야.그러나 그 후 이 작업은 흐지부지되었다고 해. 대통령이 다시 마음을 바꾼 것이겠지. 아니 그의 이너서클이 “각하, 절대로 호랑이 등에서 내려오시지 마십시오”, 다시 올려 태웠다고도 할 수 있지.호랑이에게 잡혀먹을 주군을 염려하는 충성심에서일까. 진실은 자신들이 모두 잡혀먹는다는 공포 때문이겠지.

박통, “솔직히 나, 미국X들 좋아하지 않아”<4>
권력자로부터 가까운 위치에 있는 인물들, 그 중에서도 소위 실세들을 이너서클이라 하지.권력자는 이 울타리 안에서는 말과 행동이 자유롭다고 할 수 있어. 책임 없는 소리도 하고 실수가 보장되어 있어. 비밀이 새어나가는 출구는 봉쇄되어 있고 들통이 나면 응징의 계율이 무섭거든.게다가 언론이라는 ‘하이에나들’이 물어뜯을 준비를 하고 있어. 그런데 기묘하게도 권력자는 진실을 기자에게 고백하는 수가 있어. 지금은 고인이 된 선배 언론인 J일보의 H씨의 증언.월남 갔다가 귀국해서 동양TV에 끌려나갔지. 막 대담이 끝나고 집으로 가려니까 청와대에서 날 잡으러 왔대. TV를 보고 있던 대통령이 좀 보자는 거였어. 그래 둘이 앉아 월남 얘기 한참 했지. 술이 서너 순배 오가니 취기가 올라. 예라 할 말 다하자, 이런 생각이 들더라는군.“따이한 용감무쌍 어쩌고 하지만 문제가 많습니다. 미국X들 자기들 전쟁 돈 몇 달러 주고 청부맡아 달라는 거 아닙니까.”“H기자, 솔직히 말해 나, 미국 좋아하지 않는다.

우린 국력이 약해 어떻게 해서든지 국력을 키워야 한다는 게 내 소신이야. 국력은 뭐야. 경제야. 경제는 뭐야. 돈이야. 참고 이 기회를 이용해야 돼.”한데 박통이 말야, 말끝마다 ‘미국X, 미국X’ 하더라더군.결코 그는 친미주의자가 아니었어. 일본의 만군(만주 관동군)출신이었다는 배경에서 “생리적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 그 영향도 있겠지.그러나 5·16쿠데타를 일으킨 뒤 미국과의 갈등과정이 그 원인이었다고 보여. 개발 계획에 들어갈 자금 좀 달라고 해도 노(NO), 통화개혁을 내자동원 하려니까 미 대사관에 안알리고 했다고 딴지 걸어, 권력 잡았을 땐 워싱턴 프레스 클럽으로 기자X들 시켜 이리 흔들고 저리 올려쳐, 미국이 좋은 나라일 수 만무하지.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유가적 도덕률에 젖어 있던 그에게는 미국의 틀과 사회가 마땅할 수가 없었겠지. 스타일과 문법이 비슷한 독재권력자로 볼 수 있는 전두환 대통령의 경우와 비교가 될 수 있는 대목이야. 전통이 미국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는 ‘율곡 프로젝트’ 때 극명하게 드러났지.

예산문제를 협의하는 과정에서 한 측근 장관에게 이런 말을 했어.“만약 전쟁이 일어나 한판 붙으면 곧 미군을 서부전선으로부터 철수시켜야 해. 1주일 동안은 주전선인 이곳이 밀리게 돼 있어. 미국이 하는 짓은 보나마나야. 우왕좌왕 서서 총이나 쏘다가 밀릴 게 뻔해. 본국에서는 전쟁 장면을 매스컴을 통해 연일 보도할 것이고 백악관과 의회는 의회대로 이 문제를 놓고 질질 끌다가 전략은 한달 쯤 뒤에나 나올 것이니 전선은 기울어 버릴 위험성이 있어. 그러니 뒤에서 병참 역할이나 맡으라고 하고 반격전은 우리가 하고 나가야 해.”그의 눈에도 미국은 미더운 존재가 아니라는 거지.5·16 후 검은 안경 끼고 미국에 건너가서 받았던 괄시를 십수년이 흐른 뒤 카터에게서 다시 받았으니, 워싱턴이 자기를 보는 눈이 결코 변하지 않았다는 데서 오는 생리적 반발도 있지 않았나 싶어.

카터는 한국엘 와서 박 대통령을 가까이 부를 때도 손가락으로 까딱까딱 하는 걸 목격했다는 증언도 있어.PP(프레지던트 박)는 미국과는 달리 일본과는 친한 친일적 인물로 평가되고 있지만, 일본과도 갈등이 아주 최고조에 달한 적이 있어.나중에 한은 총재를 지낸 L씨의 증언에 따르면 그 사건은 바로 ‘김대중 납치 사건’ 때였다는 얘기야. 일본정부는 곧 진사사절을 보내 사과하라는 요구를 해 왔어. 정부쪽은 적당한 선에서 무마하려고 이면 협상을 했어. 그러나 일본은 한 발짝도 안 물러났지. 웬만한 사안이라면 모르지만 DJ 납치사건은 정권의 문제가 걸리는 예민한 사항이니 PP로서는 보통 민감한 것이 아니었지. 드디어 일본측은 마지막 카드를 전달했어.‘안 보내면 국교단절이다.’청와대에는 비상이 걸렸어.

묘안은 없고 PP는 강경 일변도. 일본측 대사관은 ‘당일 00시까지’라는 최후 통첩을 했어. 이제 누군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야 할 터인데 대통령의 심기가 보통이 아니니 감히 나서지를 못해. 전문은 자꾸 날아들고 외무장관을 비롯하여 전 참모들은 비서실장 방에서 담배만 피워댔지. 마지막 순간을 재촉하는 초침소리만 높아갔어.그때 숨막히는 침묵을 깨는 소리가 들려왔어. “내가 들어가 보지” 김정렴 비서실장이었어. 청와대 일대에 내리 깔렸던 긴장감이 해소된 것은 그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였지. 결국 PP는 일본측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마음을 바꾸었어. 김정렴씨를 두고 뒤에 명비서실장이라는 평가들을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위기의 순간에 용기와 판단력을 보여준 이런 사건들 때문인 것 같아.
<다음호에 계속>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