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내가 한국에 와서 10여 년 동안 취미로 관찰 해온 한반도의 조류에 관한 논문, 아니 논문이라기보다 관찰기를 발표하려고 했습니다만 준비가 아직 안되었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때 종업원들이 나와 테이블 위에 급히 커피 찻잔을 돌렸다.
“대신 마침 여기서 만난 여자 크리스찬 한 분을 소개하겠습니다. 임채숙 이리 좀 나오세요.”

옆방 문이 열리고 여자 한 사람이 남자의 부축을 받고 나왔다. 초췌하고 화장기 없는 얼굴에 걸음걸이가 자유롭지 못했다. 보통 키에 나이는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고 미인형의 얼굴과 짧은 머리 등이 지적인 풍모를 보였다. 몹시 부상을 당한 것 같았다.
“소개합니다. 이분은 관악대학 역사학과 2학년 학생인 임채숙입니다. 독실한 크리스천입니다.”

소개를 받은 임채숙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한 뒤 마이크가 설치된 테이블 복판에 앉았다. 여자 뒤를 따라온 나이 들어 보이는 남자는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도어 곁에 서 있었다.

“임채숙 양을 여러분에게 소개한 이유는...”
스미스 목사가 말을 끊고 여자를 돌아보았다. 연민의 눈동자였다.
그때 방안으로 외국인 기자 서너 명과 사진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연방 플래시가 터뜨려졌다.

“임채숙 양을 여러분께 소개한 이유는 이 나라에는 인권을 무시하고 개인의 존엄성을 짓밟는 정권이 아직도 전혀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폭로하여 하루빨리 개선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스미스 목사는 앞에 놓인 커피 잔을 들어 천천히 마시고는 한참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의 눈은 분노로 불타고 있었다.

“임채숙 양은 크리스천 봉사 단체인 천사회의 봉사회원입니다. 주로 몸이 부자연스러운 노인이나 어린이들을 보살펴왔습니다. 며칠 전에도 그러한 노인이나 어린이가 모여 있는 집에 봉사하러 갔다가 이유 없이 정부의 수사 기관원들에게 강제로 끌려갔습니다. 무시무시한 곳에 감금되어 잔인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거의 죽음 직전에 임양을 동료들이 구출해냈습니다.”
스미스 목사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어느 수사 기관입니까?’

기자 중의 한 사람이 질문을 했다.
“확실하지 않지만 내각정보국이 주관하는 합동수사 기관인 것 같습니다. 아마도 독재정권에 항의하는 정의로운 사람들을 탄압하기 위해 임시로 만든 기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연행해간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본인이 직접 답변하시오.”
스미스 목사가 이야기하려고 하자 한 기자가 소리쳤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임채숙이 처음 입을 열었다.

“우리 학교에서는 그들이 말하는 지하 단체가 여러 개 있습니다. 그 중에도 기독교 봉사 단체들이 정의로운 활동이 아니라 이 나라 정보기관들에 밉보여 온갖 수모를 당해 왔습니다. 우리들은 목숨을 걸고 이 땅에서 민주주의와 자유를 말살하려는 권력 집단을 몰아내기 위해 싸웠습니다. 그 때문에 항상 감시당하고 있었지요.”
여자는 말을 멈추고 가슴을 움켜쥔 채 기침을 했다.

“그날도 불쌍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으로 그들의 생활비를 전해주러 갔습니다. 그런데 거기 기다리고 있던 정부 사람들이 다짜고짜 나를 차에 태워 이상한 곳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이 돈의 출처를 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듣도 보도 못한 사람들의 이름을 대면서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모른다고 하자 지하실로 끌고 가 고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구 이름을 댔습니까?”

유일한 여기자가 물었다.
“무슨 장군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봉사단을 지원하는 독지가들은 많습니다. 이름을 밝히지 않는 독지가들도 물론 많습니다. 우리를 돕고 있는 분 중에는 정부의 높은 자리에 계신 분들도 많습니다.”

“어느 곳에서 봉사를 나갔습니까?”
“그건 그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밝힐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고문을 당했습니까? 고문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수염이 덥수룩한 외국인 기자가 유창한 우리말로 물었다.

“여러 명이었는데, 나를 지독하게 고문한 사람은 머리를 짧게 깎고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군인 신분인지도 모릅니다. 뺨을 때리고 잠을 안 재우고 머리를 물통에 처박고 하는 것은 참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자인 나에게...”
여자는 잠시 말을 끊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성고문을 당했군요.”

여기자가 다시 분노 섞인 목소리로 크게 말했다.
“성고문을 어떻게 했습니까? 구체적으로 말해 주세요.”
외국인 기자가 다시 주문을 했다.
“발가벗겨 천장에 매달아 놓고 쇠파이프 같은 것을 들고... 마구 쑤셔대고 나는 피범벅이 되어...”
“그만하세요.”

스미스 목사가 여자를 제지하고 자기가 말을 계속했다.
“여자로서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잔혹한 짓을 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아닙니다. 짐승보다 훨씬 못한 자들입니다. 이 지구 위에서 그런 무리들을 영원히 추방해야 합니다.”

“납치되어간 장소도 밝힐 수 없다. 어느 기관이 데리고 갔는지도 확실히 모른다. 무슨 이유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고문한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이겁니까? 그렇다면 임채숙 양의 말을 우리가 어떻게 믿고 기사를 씁니까?”

그때까지 한마디 질문도 않고 있던 나이 들어 보이는 기자가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여러분의 양심에 맡깁니다. 우리는 더 이상 밝힐 것이 없습니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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