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백성규의 하수인이 되어 위험한 심부름을 하게 되었지요. 백성규의 아지트에 심부름 갔다가 우리 수사 요원에게 붙잡혀 왔습니다. 연행되어 조사를 받던 중 백성규가 동원한 폭력배들에게 도로 붙잡혀 갔습니다.”
성유 국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인덕 장관이 떠들었다.

“딸 같은 여학생을 붙잡아다가 발가벗겨 놓고 그 따위 짓이나 하느라고 깡패 들어오는 것도 몰랐지. 야들야들한 여학생 벗겨 놓고 가련하지도 않았대요? 시커먼 도둑놈들 같으니. 여학생 나체 보고도 그게 벌떡 서드래요? 천하 몹쓸 놈들. 정보국이라는 데도 깡패 집단과 다를 게 뭐 있어요? 흥, 도대체 얼마나 허술한 경비를 했기에 그런 일이 일어난단 말이오?”

“말이 너무 심해요. 포르노 영화 흉내 내는 겁니까? 정보국이 깡패 집단이라뇨? 그 말은 취소하십시오!”
성유 국장이 맞고함을 질렀다.

“요즘 같은 세상에 그런 추악한 고문을 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미투를 백번하고도 남을 일이네요.”
이후범 원자력부 장관이 한마디 거들었다. 그는 국무 위원 중 유일한 독신이기 때문에 인질이 된 가족이 없는 상태이다. 다른 장관들과는 입장이 달라 국무회의서는 거의 발언을 하지 않았다.

“우리 요원들은 절대로 가혹한 고문 같은 것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수사하는 요원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때로 거친 말을 쓴다든지 뺨을 때릴 정도의 행동은 합니다. 잘못된 일이지요. 그러나 그들이 어제 기자들 앞에서 주장 한 것 같은 야만적인 고문은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거짓말이란 세계적입니다. 터무니없는 말을 해서 국민들을 현혹시키는 데는 천재적인 자들입니다.”
성유 국장이 열심히 변명을 했지만 그 말을 그대로 믿는 국무위원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도대체 법이 엄연히 존재하고 정부의 서슬이 시퍼런 이 나라 수도 서울에서 수사를 받던 용의자를 깡패들이 유유히 데리고 사라지는가 하면, 서울 한복판의 특급 호텔에서 버젓이 기자회견까지 열었는데, 아무 손도 못쓰고 당하기만 했다는 이 기막힌 일을 누가 책임져야 합니까?”
박상천 해군장관의 말이었다.

“여학생을 발가벗기고 성고문을 일삼은 수사 요원은 즉각 구속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그 상급 책임자들도 법적 도의적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총리께서는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대국민 사과를 해야 합니다. 어제의 사건은 미국 선교사가 개입된 일인 만큼 세계 각국의 시선이 곱지 않을 것입니다. 유엔 산하 기구나 엠네스티 같은 인권단체서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호재가 생긴 셈이지요. 이 사건은 한 말단 수사관원이 탈선하여 여학생 벗겨 놓고 성고문 같은 가혹 행위 조금했다는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정권의 부도덕성, 나아가서는 국가의 부도덕성과 연결 될 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빈축을 사게 되고 마침내는 국가를 고립시키게 됩니다. 국제 사회에서 경제적 정치적 불이익을 당하게 됩니다.”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정채명 내무장관이 준엄한 얼굴로 한마디했다. 김교중 총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장관은 일을 너무 크게 해석하는 것 아닙니까? 설사 그런 일이 사실이라고 치더라도 지구상에 진짜 고문 안하는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고일수 법무장관이 일그러진 총리의 얼굴과 근엄해 보이는 정채명의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우리 국무위원들 사모님들은 지금 그 보다 더한 고문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가장 도덕적이라는 소위 민독추가 하는 짓이 무엇입니까?”
성유 국장이 흥분한 목소리로 정채명을 반박했다. 정채명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만 있었다.

“내무 장관도 국가를 걱정해서 하시는 말일 것입니다. 정장관도 기자회견 내용이 사실이라고 믿지는 않을 것입니다.”
김교중 총리가 분위기를 누그러뜨릴 생각으로 말했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가 못했다.

“총리께서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내가 야당하고 있을 무렵에 겪은 일인데 우리나라 수사, 정보 요원이라는 자들은 그런 짓을 하고도 충분히 남는다는 것을 내가 압니다. 남자인 나한테 하던 짓을 보면 어제 그 여학생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 정부는 반성해야 합니다.”
정채명 장관의 발언을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멀거니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야당 투사였다는 것을 상기하고 있었다.

국무회의가 결론 없이 끝나고 헤어졌다. 장관들이 비상 대기실이나 집으로 흩어졌다. 정채명 장관도 자기의 아파트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내각 정보국과 육군 정보 부대로부터 사찰당하고 있다는 것을 감쪽같이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동향 보고를 대통령에게 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그가 침실에서 하는 이야기까지 도청 당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정부에 들어와 내무장관이라는 요직에까지 있는 사람을 그렇게 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정채명은 개포동 자기 아파트의 위층에 있는 방수진을 찾아갔다.
언제나 처럼 엘리베이터 앞에서 운전사와 수행 비서를 돌려보내고 306호 자기 집에 가는 척 하고는 506호 숨겨둔 여인의 집으로 간 것이다.

초인종을 눌렀으나 열어주지 않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는 다시 3층으로 내려와 자기 아파트로 들어갔다. 가정부 아주머니가 그를 맞아 주었다.
그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잠깐 쉬다가 방수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어디에 계세요?”

언제 들어왔는지 귀가 간지러울 정도로 애교 넘치는 방수진의 목소리였다.
“내 지금 곧 올라가지.”
“목욕물 받아 둘게요.”
“응.”
정채명이 전화를 끊고 위층으로 걸어 올라갔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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